연혁
가곡면은 1914년 단양군과 영춘군의 합병이 있기 전에는 영춘군에 속하였다.
영춘군은 1895년 이전에는 영춘현으로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에서는 자춘현으로 내성군(영월)에, 또 그 이전에는 고구려의 을아단현에 속하였다. 조선말(1898년 무렵) 영춘읍지에는 군내면에 향산리·보발리, 대곡면에 대리·사평리, 가야면에 덕천리·대리·여천리의 이름이 보인다. 우리 단양지역의 일반 개요 : 1995, 단양군 기록에는 1909년 영춘군 군내면에 향산리·보발리, 대곡면에 어의곡리·대리·사평리, 가영면에 여천리·덕천리·가대리의 이름이 보인다.
이 무렵 대곡면 대리에서 → 대대리로 변경이 추정된다.
1914년 | 단양군과 영춘군의 합병 후의 기록을 보면 가야면과 대곡면이 합쳐지고 일부 마을을 편입하여 단양군 가곡면으로 개칭하고 있다. 당시 가곡면 7리는 여천·가대(소재지)·덕천·사평·대대·어의곡·보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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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 영춘면 향산리가 가곡면에 편입되어 현재까지 8개리로 지속되고 있다. |
위치 및 지세
- 동쪽으로 소백산맥을 경계로 영주시 단산면·순흥면·풍기읍과 접하고 있고, 남쪽으로 민배기재·대궐터·매남치·봉우등·고수고개·단양취수장을 경계로 단양읍과 접하고, 서쪽으로 매포읍 상괴·하괴와 접하고, 북쪽과 북동쪽으로 어상천면과 영춘면에 각각 접하고 있다.
- 주요 산으로는 비로봉(1,439m), 국망봉(1,420m), 신선봉(1,362m) 등의 고봉이 소백산맥을 중심으로 위치하고 있다.
- 남한강은 영춘 하리에서 이어받아 가린여울 - 늪실 - 향산 - 백암(가대교) - 사평(새빌) - 아평 - 덕천(중말) - 하덕천 - 단양취수장을 거쳐 단양읍 도담으로 이어진다.
- 하천으로는, 하일천이 어의곡에서 발원하여 14.7km를 흘러 남한강에 합수되고, 보발천이 보발에서 발원하여 7.5km를 흘러 남한강에 합류하며, 어곡천이 어상천 심곡에서 이어받아 3km가량 경내를 흘러 남한강에 합수된다.
- 소하천으로 향산천·덕가천(보발)·구익천 등이 있다.
- 마을 분포는 남한강을 분기점으로 강 북쪽에 가대·여천·덕천이 있고, 강 남쪽에 향산·사평·보발·대대·어의곡이 있다.
대통령의 방문
가곡면에는 두 번에 걸쳐 대통령의 방문이 있었는데,
- 첫 번째 방문은 1975년도 박정희 대통령의 두산 마을 방문이었고,
- 두 번째 방문은 2005년도 노무현 대통령의 한드미 마을 방문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두산 마을 방문
단양군은 1974년에서 1976년까지 3년 동안 화전정리 사업을 전개하였는데, 이 것은 국회가 정한 화전정리 관계법에 의한 것으로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국책 사업이었던 것이다.
화전정리 사업이란 산림을 보호하기 위하여 일정 고도 이상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저지대로 이주시키는 사업으로 쉽게 이해될 수 있다. 두산 마을은 고지대인 만큼 다른 어떤 마을보다도 우선적으로 정리 대상마을이 되었다.
본래 두산마을은 두산 폭포 사이의 소로를 통하여 겨우 세상과 연결되었으며, 생필품을 하나 얻기 위해서도 급경사의 산길을 지게로 오르내려야 했던 생활이 매우 불편한 산간오지의 마을이었다.
1972년 박병용 이장 재직 시에 주민들은 공론을 내어 마을길을 닦기로 결정하고, 37호의 주민이 삽과 괭이로 땀 흘리기 4년여 끝에 산 아래로 이어지는 마을길의 완성을 보았다.
이러한 때 화전정리 사업 대상 마을이므로 이주하라는 군청의 통지는 주민들에게 마른하늘에 날벼락과 다를 바가 없었다.
주민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당시 제천 · 단양지역의 국회의원이던 이해원 의원을 찾아가 대통령 면담의 주선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국회의원이 단지 37호의 마을을 위하여 대통령에게 줄을 대기는 쉽지 않았다. 이에 주민들은 국회의원의 자택 앞에서 농성을 시작하였고, 농성 수일 만에 면담이 성사되었다는 답변을 들었다.
당시 주민 대표 4인(박병수, 박병용, 박준삼, 김원근)은 대통령을 면담하여, 마을의 사정을 이야기하며 천신만고 끝에 길을 넓혀 놓았으니, 이 공을 생각해서라도 마을을 보전하게 해달라고 청원하였다. 이에 대통령은 일간 마을을 방문하겠노라고 약속을 하고 결정을 보류하였다.
약속한 날짜가 되어 마을에 연락이 오기를 ‘헬기장을 닦으라’하여 주민들은 공터를 이용해 횟가루를 뿌려 헬기가 착륙할 수 있도록 준비하였다. 1975년 6월 어느 날, 도지사 등 고위관료를 태운 지프차가 마을에 도착하였다.
일반 차량으로 올라 올 수 없을 만큼 길이 가팔라 모두 지프차로 옮겨 탄 것이다. 그리고 오후 3시경 헬기 한 대가 날아와 국방색 잠바에 검정 선글라스를 착용한 사람을 내려 놓았는데 그가 바로 박정희대통령이었다. 대통령은 주민들이 애써 닦아놓은 길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이윽고 주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굳게 닫혔던 입을 열었다.
“이 동네 사람들은 땡비 보다 더 독하고 이북의 김일성보다 더 무서운 사람들이다. 여기 사람들 살려줘라.” 이로써 두산 마을은 유일하게 화전정리 사업에서 제외될 수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한드미 마을 방문
2005년 5월 21일 오전, 단양경찰서 경찰들은 단양읍 요지에서 교통 통제에 들어갔다. 이윽고 경찰 싸이카 등 경호대의 긴 꼬리를 달고 귀빈용 차량이 시가지를 통과하여 고수대교를 건넜다.
그리고 잠시의 침묵을 깨고 거리는 다시금 왁자지껄 해지면서 대통령의 한드미 마을방문을 이야기하였다.
귀빈의 차량이 지나가는 일은 간단한 것에 불과했으나 시골의 작은 읍 단위에서는 볼거리로 인구에 회자되기에 충분하였던 것이다.
우리 시대 농촌은 존립의 위기에 처하고 있었다. 무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우리 경제는 부득불 농산물 개방에 대한 국제적 요청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고, 이에 따라 외국산 농산물의 수입과 농업경쟁력의 상실로 1980년대 후반부터 농업은 점차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다.
많은 석학들이 농촌문제를 이야기하였고, 정부는 20년 가까이 농업 진흥정책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농촌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농촌과 농민의 위기는 시간이 흐를수록 악화될 뿐이었다.
대통령이 방문한 한드미 마을은 행정리명으로 가곡면 어의곡2리이며 단양읍에서 고숫재를 넘어 새밭 계곡으로 우회전하여 들어가 길이 끝나기 전에 있는 소백산 아래의 청정한 마을이다.
전체 가구 39호가 살고 있는 조그만 산골마을에 불과하지만 마을 이장을 중심으로 친환경농업을 시작하고, 전 가구가 농업과 연계한 농촌관광사업에 참여함으로써 잘 살게 된, 앞으로 농촌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모범마을이었다.
농토가 적고 산지가 많아 예전에는 다른 곳에 비해 소득이 떨어졌지만, 주민들이 좌절하지 않고 한마음으로 힘을 합쳐 주변 환경을 이용한 친환경 농업을 실천하고, 정보화시대를 맞아 인터넷을 통해 이를 도시민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린 결과 농촌체험마을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통령의 방문은 농촌사회의 발전 방향 제시를 위한 모델로 한드미 마을이 선택되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다시 말하면 대통령의 방문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농촌의 미래로서 한드미 마을이 다른 모든 마을의 선례가 되었다는 점이 더욱 의의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