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포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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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옥녀직금형 묘터
작성자 관리자
내용
  - 소재지 : 영춘면 남천리 대산골
- 년   대 : 조선초기
- 제공자 : 영춘면 남천리 원만터 남만규 -
- 제보자 : 영춘면 윤수경(1976. 11. 7)
 
 
1영춘은 삼국시대부터 촌락이 형성되었고 3국의 국경분쟁이 심했던 지역이기도 하며 근세에는 군청소재지가 면으로 강등하면서 단양군에 흡수된 지역이기도 하다. 그 중 조선초기 영춘현감에 관한 이야기와 산천의 아름다운 땅의 기세에 의하여 면단위로 쇠말뚝이 가장 많이 박힌 곳이 영춘이기도 하다.

남천리 뒤형재봉 산맥으로 의풍, 동대지역에 옥녀직금형(하늘의 선녀가 비단옷을 짜는 형극)극이 있다하여 영춘에 오는 현감마다 자기가 그 자리를 차지했으면 했던 것이 현감들의 마음인 것 같다. 현감이 부임할때와 이임할때는 꼭 인수인계 사항으로 영춘의 옥녀직금형과 부채형극을 인수인계하면서 꼭치산 치수에 전념할 것을 당부했던 것 같다.

부임하는 현감마다 옥녀직금형의 형극을 찾지 못했는데 ○○○현감이 옥녀직금형의 형극을 찾고서 자기가 선정을 베풀어서 이 형극을 찾았으니 가문의 경사요, 지역의 경사임을 자랑하는 자축연을 열고 지역사람과 관군을 동원하여 산에 나무를 베고 군관소금창고의 비축소금을 30섬이나 가져오게 했다. 말이 숫30섬 소금30섬이지

그 옛날에 숫 30섬을 하자면 얼마나 많은 인원이 동원되었으며, 거기에 들어가는 비용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또 이것은 완전한 개인의 일이지 공무와는 무관한 일이다. 군관까지 소금1섬(2가마니120㎏)을 가져오자면 2명이 동원되야 했고 30섬이면 60며의 인원이 영춘까지 와야했으니 이 또한 하나의 민폐였기에 주민들의 원성이 있었다.

그러나 누구하나 내색하지 못했다. 영춘 ○○○현감은 옥녀직금형에 풀이나지 못하도록 소금 30섬을 60보 안으로 뿌리고 숯은 좌향을 정하고 가묘한 곳에 뭍어두어 아무리 장마가 져도 해만나면 마르는 지역으로 찾을 수 있게 하고는 시간만 있으면 가묘지역을 가보니 점점 자리에 대한 발복의 욕심이 용솟음 치게 되었다.

이그러다 보니 정사와 주민다스림이 주민들의 의견에 부합치 못하고 아전에게 위임타 보니 선정을 베풀지 못하게 되었다.영춘현감직을 이임하고 장례를 지내려고 가묘지역을 찾았으나 묘 자리는 온데간데 없었다 한다.

이러한 묘자리를 잡으려고 전국의 얼풍수도사 지관들이 소백산을 누볐다. 그러나 그후로 옥녀직금형의 형극을 찾은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이 지역의 지명이 옥녀직금형의 형극과 관계있는 불당골(호롱불) 독골(실저장소) 오리골(실오라기) 북받이골(실에 북을 넣어 밀면 끝으로 나감) 나르실(실을 풀을 먹여 넣어서 말림) 배틀재(기현령 배틀을 고정시키는 자리 ) 독바위골 옥녀봉 알골등 많은 지명이 증명하고 있다. 남천 대산골에는 원만이가 터를 찾으려다 평생을 찾지 못해서 골짝이 이름이 원만터이기도 하다.

많은 풍수지사 지관이 다녀간 사람과 대담해 본 결과 자기가 쌓은 적이 없고 산의 나무를 30섬 숯을 만들려고 베었으면 틀림없이 큰 나무를 베었을 것이고 단 산신을 믿는 사람들이 치성들인 나무를 베었을 터이니 자연 여러사람의 원성이 자기의 덕과 복을 깎아 내렸고 대자연의 섭리인 生을 막으면 死로 연결되어 본인이 화를 면치 못함은 대자연의 이치다. 자연을 훼손하면 벌을 받는다는 것은 하늘이 가르치는 것이라고 판단한다.

그래서인지 75년도까지만 해도 화전민들이 이 지역을 떠나지 않고 출입경작을 많이 했고 자연숭배사상이 많았으나 지금은 거의 사라진 상태이나 언젠가는 옥녀직금형의 형극이 나타날것이라고 이지역 사람들은 지금도 믿고 있다.
등록일 2007년 12월 27일 9시 17분 17초
수정일 2014년 10월 4일 23시 37분 1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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