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강면

대강면 게시판 상세페이지, 게시물 상세내용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제목 죽령과 죽지의 탄생설화
작성자 관리자
내용

삼국유사 효소왕대 죽지랑조에서, 삼한병란이 일어났을 때의 일이다. 술종공이 기병 삼천을 거느리고 삭주도독사로 부임차 가게 되어 죽령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 한 젊은 거사가 고갯길을 닦고 있었다.
공은 거사의 용모와 인품에 탄복했으며 거사도 공의 빛나는 위세에 감복하게 된다. 임지에 도착하여 한 달이 지나서 공은 꿈에 죽령의 거사가 자기 방에 들어오는 꿈을 꾸었으며 공의 부인도 같은 꿈을 꾸었다는 말을 듣고 공의 부부는 매우 놀라서 거사에게 무슨 변괴가 일어나지나 아니했나 생각하고 사환을 시켜서 거사의 안부를 물어오게 한다. 사환이 돌아와서 거사가 죽은지가 며칠이 되었다 아뢰자 그 죽은 날이 공이 꿈꾸던 날과 같았다. 공이 말하기를 그가 장차 우리 집에 태어날 것이다 하면서 다시 사람을 보내어 죽령 북쪽 봉우리 묻고 돌로 미륵1구를 만들어 무덤 앞에 안치하게 된다.

꿈에서 거사를 본 날부터 공의 부인이 태기가 있어 태어난 아이를 죽지라 부르게 된다. 죽지는 자라서 벼슬길에 나가게 되어 김유신장군의 부장으로서 삼한통일의 대업에 참여하게 되고 진덕·태종·문무·심문의 사대왕조에서 재상에 올라 나라안정에 크게 헌신하게 된다.

이 기술대로라면 거사의 무덤이 있고 그 무덤앞에 미륵1구가 있어야 하지만 죽령 어디에도 그런곳은 없다. 물론 오랜 세월 속에서 인멸되어 실전되었을 가능성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같이 설화는 하나의 사실을 미화시키거나 분식효과를 나타내게 하는 발표의한 형식이지 기록전체가 객관성 있는 사실적인 묘사라고 볼 수 없다. 이런 류의 서화는 죽령 희방사와 부석사의 창건 설화도 있다. 희방사는 계림호장 유석의 딸과 두운스님, 부석사의 의상스님과 선묘와의 사랑 이야기를 신화적인 베일에 씌워 꾸며 놓았기에 스님들의 구도자적인 인품에 손상을 주는 일없이 승화된 인간상으로 표현되어지고 있다. 삼국유사의 많은 부분에서도 불교의 윤회설과 교화를 위한 은유법이 원용되고 있지만 고대문화의 신화적인 속성을 이해한다면 별 무리 없이 해법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죽지랑의 경우, 한달 전에 죽령에 있었던 거사의 술종의 아들이 되었을 것이다. 다만, 양자는 실자만 같지 못하다는 사회적인 제약과 통념이 있었을 것이기에 술종부인의 배를 통해서 얻은 아들임을 강변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당시의 화랑은 신라의 상류계층의 자제만이 입적할 수 있었으나 양자임을 말할 형편이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한편 죽지의 사회적인 지위와 명성이 확보되었을 때는 그가 정승을 지낸 술종의 아들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도 설화는 더욱 날개를 달고 번져나갔을 것이다. 선덕여왕 6년 서기 637년 우수주를 만들고 군주를 두었으며 경덕왕때(742)와서 이름을 고치어 삭주라 했다고 삼국사기 잡지제 4지리 2조에서 밝히고 있기에 솔종공이 죽령을 넘은 것은 637년 이후 삼한병란이 있은 해였음이 분명해진다.
637년 이후 삼국관계는 다소의 충돌은 있었지만 국가적인 대변란이라고 일컫을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아니했다. 이러다가 641년 3월 백제 무왕이 몰하고 태자 의자왕이 즉위하여 신라의 대야성을 점령하게 되자 이 싸움에서 신라는 김품석, 죽죽외 많은 장수와 군사들이 전사하게 된다.

다음해 고구려에서는 연계소문이 영류왕을 죽이고 스스로 막리지가 되어 실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이때부터 삼국관계는 지금까지 없었던 긴장 상태가 조성되어 신라는 국제정세의 위급을 깨닫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구원을 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삼한병란의 시작을 614년으로 보고 있으며 이 해 백제와의 싸움에서 많은 장수를 잃게 된 신라는 군주의 새로운 임명과 이동이 이루어져 김유신은 압량주군주로 가게 되어 술종도 이때 삭주군주로 가게되었을 것이다. 이때 술종에 의해 발탁된 죽지는 화랑교육을 받고 8년뒤인 649년 대장군 김유신, 진춘, 천존등과 함께 도살성(지금의 천안)에서 백제군을 맞아 싸워서 공을 세우게 되었다. 이때의 죽지의 나이를 27세로 보게되면 술종공이 죽령을 지나가던 해의 죽지의 나이는 19세의 젊은 거사였음이 산출된다.

때문에 죽지는 죽어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 다만 살아서 술종의 아들이 되어 떠났을 뿐이라 한다.

체보자주 : ① 죽령길의 개설과 죽지랑(대동지기)권5 단양령개로조 죽령 동남 30리 순흥 계통 경상좌도 대로 신라 아달라왕 5년 춘사죽죽 시개비로 교명지령서유 죽죽사 피험차 상유고성유지 신라시소축.
② 우리고장 전통문화 영주시 영풍군편 죽령재와 죽지랑 아달왕 5년 3월 죽죽이 개설(삼국사기인용) 선덕여왕 11년 642년 대야성 함락시 전사한 죽죽과 484년 이라는 긴 세월 차이가 있어 동명이인이 분명하다.

등록일 2007년 12월 26일 19시 1분 20초
수정일 2010년 8월 4일 14시 57분 50초

목록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