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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수은정 짓고 영의정 탄핵당한 류성용
작성자 관리자
내용

선 구곡을 명명한 사람은 조선 영조때 참판을 지낸 경상 오대익이라고 하는 설도 있다.
경삼 오대익이 교리 시절에 퇴락된 수운정을 중창하면서 수운정을 중심으로 운선구곡을 명명했다고 1955년에 단양군수를 역임한 김상현의 저서 " 단양팔경" 에 기록되어 있다. 군지에 전하는 현동자 기행문에도 "운암(운선구곡)은 설령(죽령)의 동북방에 있으며 본래는 조가네 땅이다.

유서암정(수운정)이 오래되어 교리 오대익이 중창하고 그곳에 살았다 " 라는 기록으로 보아 확실한 것 같기도 하여 교리를 지낸 오대익의 운선구곡가를 소개 한 글은 다음과 같다.

운선동리유선영 : 운선동 계곡엔 신선이 있을것만 같구나
단벽삼치옥윤정 : 노을에 젖은 높고 낮은 절벽 , 옥같이 맑은 물이여
욕식주의 행근원 : 신선인 주인을 알고자 하나 간곳을 모르니
어가시청구곡성 : 고기 낚는 촌부의 노래로 운선구곡가라 부르리

[일곡 대은담]
일곡유심불용선 : 일곡은 그윽히 깊으나 배를 탈일 없고
삼시회폭분경천 : 봄 여름 가을마다 폭포 주위엔 꽃으로 붉어지네
산령공누진소식 : 산신령도 참소식이 세상에 전해질까 두려워
장쇄창응거준병 : 높고 푸르던 하늘을 어둠으로 가린다.

[이곡 황정도]
이곡동안두솔봉 : 이곡의 동남쪽엔 도솔봉이 있는데
좌래매일불종용 : 바르게 앉아서 지금까지 모습 하나 흩뜨리지 않네
기년일자황정오 : 황정경을 잘못 외워 적선이 되었는지
관령운산천먼중 : 산과 구름에 묻혀 있구나

[삼곡 수운정]
삼곡파류암사선 : 수운정 굽이의 암벽은 배만 같구나.
애옹정각석하연 : 서애 유성룡의 수운정은 얼마나 오래인가
선인일소운중좌 : 신선은 구름속에 앉아서 미소 짓는데
회수홍진을가린 : 돌아보니 속세는 참으로 불쌍하여라

[사곡 연단굴]
사곡연단개양암 : 사곡은 양쪽의 바위를 뚫어서 만들었고
산광운영치염산 : 산 빛과 구름 그림자가 부채살 같아라
선동위보단사열 : 선동이 약을 잘 뎁혔노라고 알리자
소권조사화벽담 : 웃으며 났시줄 겉어 푸른 못을 건넨다.

[오곡 도광벽]
오곡영회원복심 : 오곡은 엉기고 굽어서 근원은 더욱 깊은데
단병족족은운림 : 벼랑 벼랑마다 나무는 구름에 가리운 듯
흉중자유광명사 : 가슴속에 광명마다 나무는 구름에 가리운 듯
휴향공산증도심 : 쉬면서 산을 보니 밝게 깨닫겠네

[육곡 사선대]
육관선정기곡만 : 육곡의사선정은 냇가 바위 위에 지어 놓았네
현문침침주상폐 : 삽작문을 적적하게 낮에도 항상 닫는군
정녕옥자공산향 : 정령 신선이란 메아리 같은가
지시상옹진일한 : 하루하루가 한가로움을 아는 이가 신선이라네

[칠곡 사인암]
칠곡전임칠성탄 : 칠곡앞에는 칠성여울이 있어
조중불염백회간 : 아침저녁으로 보아도 싫지를 않아
세간시화나능차 : 세상에 그림인들 이보다 나랴
유견담심월색한 : 오로지 물 속의 달빛만 빛나고

[팔곡 선화동]
팔곡도화양안개 : 팔 곡의 냇둑에는 복숭아꽃 흐드러져
무릉어자기시회 : 무릉도원에서 고기 잡은 이는 언제나 돌아올까
삼암지득신선자 : 상·중·하선암은 신선바위라 불리우건만
수견진선입동래 : 무위진인이 이 동네로 들어오는걸 누가 봤느냐

[구곡 운선동]
구곡산개경광연 : 구곡의 산은 트여 경계가 완연하고
장림역역견청천 : 장림리가 역력하고 맑은 내가 보이는데
단구적시인간세 : 단양도 역시 사람 사는 세상이라
불신인간별유천 : 속세 속의 별천지를 누가 믿으랴

그래서 정감록파들이 단양영춘에 많은 화전을 일구어 먹고살았다는 것이 십승지의 도표에도 나타나지만 쇠말뚝을 많이 박은 것을 보아도 우리지역은 일본사람들이 살기 좋고 인물 많이 나는 길지임이 틀림없다는 것을 증명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채보자주 : 운선구곡은 일면 유곡이라고도하며 운암구곡이라한다. 이곳을 다녀간 명인은 수없이 많다. 고려, 조선을 통하여 문인이나 묵객이나 권력가치고는 지나가지 아니한 사람이 없는 곳이다. 대강면 현 4개리의 땅이 본래 조가네 땅이였다고 한다. 서애 류성룡선생이 선조로부터 하사 받은 호피한장을 팔아서 일대를 매립하고 수운정을 지었고 이곳에 와서 심신을 달래고 정책구상을 했었다. 1591년 우의정으로 있을 때 명나라 토벌을 계획하는 내용의 일본의 국서를 받았을 때 이를 묵인하려는 이산해의 주장을 물리치고 명나라에 알려 의혹을 벗었고 1592년 임진왜란시 도예찰사로 군대를 총괄했고 이순신, 권율을 명장으로 등용시키고 영의정에 올라 왕을 평양으로 모셨고 신집의 탄핵으로 사퇴했다가 평안도 체찰사가 되어 평양의 난을 진압하고 왜군을 파주까지 몰아낸 공로로 다시 영의정에 올라 군사를 총지휘하는 실권자였다.

당시에는 당파싸움으로 일본군 침입의 징조파악을 위해 같던 일본 사신마저도 당리당략에 의하여 진실을 왜곡하던 때이다.
임진왜란이 끝나던 해인 1598년 왜란중 유성용이 이순신을 감싸고 돌았고 일본국서 사건을 공론으로 남인, 북인의 당쟁 중에 당시의 권모술수로 이름난 남이공과 스승 정인홍의 합작품을 문홍도가 서애 류성용의 죄상을 조목조목 들어서 탄해상소를 올리는 과정에서 "서애는 임진왜란이라는 전란중에서 돈을 모두어서 단양의 경치 좋은땅에 미도(중국 삼국지에서 악역으로 명성을 떨치는 후한의 재상 동탁이가 미 땅에다가 궁전같은 별장을 지어 별장 창고에 중국 천하의 금은보화 보물, 술, 각종물건을 다 모았다.

중국의 역사에서도 유명하고 아주 화려한 이름높은 별장임)같은 별장을 지었으며 향락을 즐기고 있으니 전쟁 중에 영의정이란 사람이 이럴 수가 있느냐는 상소로 임진왜란이 끝나기전 사표를 내지 못하고 영의정에서 남인의 우두머리인 서애는 쫓겨나서 고향인 안동으로 낙향한다. 이때 서애는 편지속에서 붉고 푸른 절벽마다 탁핵의 글속에 끌려드는구나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그후 오대익 참판이 수운정을 중건하고 살면서 운선구곡의 글로 남기게 되었다. 운선구곡중 사선대에는 1683년 단양군수로 부임했던 홍만선(1642∼1715)선생은(조선 현종 7년 1666)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조선 숙종 때에는 단양에 제 82대 군수로 부임하고 상주목사 장악원장(현재 국립국악원장)을 역임한다. 홍만선 군수는 10년뒤에 다시 사선대에서 내외종간 형제들이 함께 모여서 시를 짓고 즐겼다고 적었다. 사선대 홍만선, 김성조, 이희조, 이해조등 높은 벼슬한 사람들이 있었음을 볼 때 지금 없어진 사선대 정자 주춧돌과 나무를 바위에 안치고자 팠던 부분의 윤곽이 지금도 확인됐다.

사곡이란 글자는 수해복구로 묻힌 것을 다시 파도록 했다. 완전한 수해복구가 끝나고 사인암지구 택지정리가 완료되면 다시 사선대가 사선정으로 바뀌어 건립될 날이 올 것이다. 여담이지만 선조대왕이 백사 이항복에게 현시대의 청백리는 과연 누구일까 했더니 백사는 1번을 서애를 대었다한다. 단양이 경관으로 인하여 영의정이 탄핵당한 땅을 노산 이은상 선생은 시로서 서애의 누명을 벗겨 주었다. 역사는 물 같이 가는 것, 사람은 구름같이 가는 것, 옳은 인 어디계시고 그이는 누구던고, 수운정 이름 그대로 물과 구름만 남았구나.

어느때 수운정이 퇴락하여 없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수운정 터와 절벽에 남아있는 암각자만이 옛 영화를 알림뿐이다. 암각자는 아래와 같다.

수파심불경 : 물결은 먼저 흐르려 다투지 아니하고

의차의구진 : 구름 또한 유유히 흐르는 구나

등록일 2007년 12월 26일 18시 59분 29초
수정일 2010년 8월 4일 15시 4분 13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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