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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매포읍의 내력
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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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포는 옛부터 매질포라 했다. 즉 현재의 국립여관과 같은 매질포관이 있어 여기에 매자와 포자를 따서 매포라 했다. 원래가 단양군의 북일면 지역이나 북일면과북이면을 합하고 1914년 전국 행정 구역조정때에 창말과 신매리를 합해서 매포리라 부르게 된다.

역사적으로는 '80. 12. 1. 매포리가 매포읍으로 승격되었으며 단양읍과 매포읍 간 경계조정으로 인하여 도전, 별곡, 도담, 상진이 대통령령 11716호로 '85. 6. 20. 단양읍으로 편입되었다. '88, '90 수해와 공해이주 보상으로 매포 1,2,3우덕1,2,3리 등 모든 마을이 이주했다.

옛날 이야기로는 이곳에 매화낙지 명당 자리가 있다하여 많은 풍수들이 찾아왔으나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다. 명당터의 이야기는 토정 이지함 선생이 구담봉에 은거하면서 매포를 지날때 갑자기 안개가 끼이고 앞이 안보여서 이곳에 필시 명당자리가 있었는데 나같은 사람(낮추어 말함)은 아직도 이런 성지를 볼 수 없음을 반성하고 가지고 다니던 세옹밥을 지어 치성을 드리니 안개가 걷히였다.

그때 한 말이 어룡지하 십수지내 란 말이 전해 오는데 풀이하면 매포천과 남한강이 합치는 곳에 깍아지른 암벽과 절벽이 병풍처럼 쳐 있으니 그 아래가 어용지하요 두강물이 합치니 물의 모양이 열자와 같으니 십수지내이다 라고 하는데 어떤 사람은 매화낙지혈을 잡으면 금시발복할 것이요,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했고 또 일설은 그곳에 묘를 쓰거나 집터가 있으면 3대가 걸인지지라 했기 때문이란다. 또 일설은 매화낙지터는 시멘트 공장이 자리잡았다. 여기서 나오는 흰연기(수증기)가 땅에 떨어지니 매화낙지이며 3대 걸인지지는 시멘트 공장에서 돈을 벌어서먹고 살기 때문에 걸인지지라는 것이다. 말은 붙이고 생각 하기에 달려 있지만 땅 이름은 오묘한 것이다.

'88과 '90. 8. 19.수해로 충주댐 수위조절 문제로 인하여 성신양회(시멘트공장)가 물에 잠기고 주민들이 5번국도를 막고 국회 수해 시찰단을 오도가도 못하게 점거하자 경찰 3개중대가 교통마비 상황을 해결하려고 충돌했다.

주민들이 도로를 점거하자 국도의 차는 죽령과 제천까지 정체현상을 보였다. 이때에 주민을 진압하기 위하여 진압장비로 방폐와 곤봉(매)을 가지고 대기 상태에 이른다. 이것 또한 매질포에 인연을 땔 수가 없다.

한강에는 마포와 매포가 있다. 浦자는 배의 정박지 이다. 옛부터 삼봉나루(매포)는 유명했다. 외국인이 1894. 4. 30.배를 정박 시키고서는 “한강이 소나무로 덮힌 절벽을 둘러싸이며 짙푸르게 멀리 흐른다. 북서쪽으로는 강이 수려한 절벽밑으로 돌연한 음악소리를 내며 높은 봉우리 세계로 이루어진 솔미산 아래로 살아진다. 공원처럼 생긴 언덕위의 도담마을은 웅대할 뿐 아니라 풍요로움이 있었다.”로 이사벨라 버드 비숍여사가 기행문을 적고 있다.

성신양회 공장내부까지는 매포가 생긴이래 가장 많은 배가 떠서 다녔다 (고무보트, 유람선 스치로폴배) 아마도 이때의 배를 보고서 梅浦란 이름을 지었는지 모른다. 강가에 사는 마을이 수해로 인하여 생긴 우화중 영월것만 말하면 德浦리는 물속에 들어가서 덕을 보게 되었고 영월의 東江다리는 철교와 인도교가 끊겨져 나가 동강난 東江다리 였다. 강원도의 뗏목이 이곳 매포에서 잠을 잤다. 경복궁을 지을때 오대산의 벌채목과 소금배가 이곳에 머물렀다. 그러나 이제는 매포리의 매포읍사무소 시대를 마감하고 매포읍의 평동시대를 열어가고 있으나 梅浦의 내력은 아직도 영원히 미궁에 있는것도 있다.

등록일 2007년 12월 26일 18시 41분 51초
수정일 2010년 8월 4일 13시 45분 1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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