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 마을은 어상천면 삼태산에서 힘차게 뻗어내린 좌청룡과 마을뒤에 노적봉이 자리잡고 있어 청룡안이라는 풍수 지명을 갖고 있으며 백암리는 청룡안 동쪽에 자리잡고 있어 마치 배가 정박하고 있는 모양의 뱃머리에 해당되는 지형으로 인해 백암이 또는 배기미라고도 불려져 왔다. 이 마을에는 어느정도 돈과 재산이 생기면 이곳을 떠나서 다른 곳으로 가서 살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재물이 자꾸 줄어들고 종당(나중)에는 원래대로 된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다. 얘긴 즉 배에 짐이 가득 실리면 배는 떠나가야 하는 이치이기 때문이다.
옛날 이마을에 코흘리개때부터 홀로 꼴 머슴을 살면서 사는 어린이가 있었는데 한집에서 여러해를 머슴살이를 하면서 어느덧 떠꺼머리 총각이 되고 어느정도 나이가 들면서 한달에 쌀 한되박씩 받아서 모은 세경쌀을 주인집에 장리쌀을 주고 푼푼이 모아서 어느덧 땅마지기나 장만하게 되고 이렇게 이십년 머슴살이에 재물이 생겨 주인집은 세경쌀 몫으로 집과 땅을주고 떠나가 다른곳에 나가서 살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세월은 흘러서 장가도 들고 5남매를 두고 다복한 삶과 더불어 자기도 꼴 머슴을 두고 넉넉한 생활로 불어가는 재산에 행복한 세상을 살게 되었는데 빈손으로 이 만한 재산이 모였으니 그 사람에게는 많은 재산이 되었고 즉 인생의 배에 가득찰 재산임에 틀림이 없는데 어느날 남루한 옷차림을 한 거사가 이곳을 지나다가 주인의 관상과 인품을 보아 곧 이곳을 떠나야만 우환이 없을 것 같아서 하룻밤 유숙과 한술밥을 청하게 되었는데 주인이 그말을 듣자 문득 내가 예전에 어떻게 살었던가 꼴 머슴으로 들어와서 먹을 것 제대로 못먹고 입을 것 안입고 등걸(나무토막) 잠을 자면서 이룩한 재산이 아니던가? 그런 생각에 "내 먹다 죽는한이 있어도 당신 줄 밥은 없소이다." 사람, 보기는 안 그렇게 보이는데 왜 그리 야박하냐"며 돌아서 나가는 꼴을 보니, 부화가 치밀어 때마침 꼴 머슴이 외양간에서 거름을 치고 있는데 거름대를 받아서 "에이 이거나 먹으라" 하면서 거사를 향해 던지니 거름이 날아가서 거름세례를 받은게 아닌가? 거사는 빙긋이 웃으면서 "거름이라도 받았으니 고마우이 꼭 알려 줄 말이 있으니 그대로 하시오"
"당신은 재물복이 다 찼으니 이곳을 떠나시오. 그렇지 않으면 재산이 줄어들고 집안에 우환이 생겨 본래 당신이 머슴이 됐던 것과 같이 돌아갈것이니 이곳을 떠나서 살아야 할 것 같소"
"정 이곳을 떠나기 싫으면 마당 한 복판에 커다란 우물을 파고 삽짝문 높은 담을 쌓으면 재산이 나가지 않소"
하고 홀연히 떠나가는게 아닌가. 거사가 자기한테 거름을 던지는데 옳은 말을 해주지 않고 좋은 얘기는 아니다 라고 생각하여 미련을 피우고 말았다. 그 뒤 백일이 지나면서 둘째 아들이 밖에서 놀다가 허리를 다쳐 꼽추가 되고 딸아이는 집안 꼴 머슴과 눈이 맞아 히근덕거리지 않나 그 와중에 아내는 갑자기 복통을 일으켜 어떤 약을 써도 듣지를 않는 등. 집안에 우환이 겹치고 돈 쓸 일만 터지니 불현듯 그 거사가 하던 말이 생각나서 그 길로 마당 한 가운데 커다란 우물을 파고 삽작담을 헐고 높다란 담을 쌓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잠잠해야 할 집안은 갈수록 우환이 더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3년만에 겨우 집 한칸 밭 한자락 남게되어 예전과 진배없는 꼴이되고 말았다.
그도 그럴것이 형상이 배 모양인데 마당 한가운데 우물을 팠으니 배 밑창을 뚫은것이고 배밑창이 뚫어졌으니 배에 물이 고인데다가 집 앞에 높다란 담을 쌓았으니 뱃머리 앞을 가려 배가 앞으로 나가는 것을 막게 되었으니 영락없이 침몰하는 배 모양이 되고 만 것이다.
또한 마을을 감싸고 있던 좌청룡혈을 병자호란 당시 이여송이 이 강산을 짓밟고 유린할 때 청룡혈을 끊었다고 한다.
그 뒤 이곳에서는 큰 인물도 재산도 모으는 사람도 없이 평범한 마을로 전락되었다고 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인 영의정 성룡이 선조에게 그를 해직시켜 어머니를 구출하도록 읍소하니 이 건의가 받아들여져 그는 어머니를 비롯한 온 가족이 모두 무사하도록 하여 모두가 그의 효심을 칭찬하였다. 그해 가을에 풍기가 군수(豊基假郡守)가 되었으며, 전란의 어려움이 있음에도 조공을 평시와 같이 함으로써 얼마 뒤 다시 정군수(正郡守)가 되어 왜적들의 위협을 받고있는 백성들의 생업을 보호하는데 힘썼다. 그 뒤 원주목사로 승진 되었으나 어버이의 노쇠함을 핑계하여 사퇴하였다. 군국기무(軍國耭務)에 관한 소를 올려 선조로부터 인정을 받아 조의(朝議)에서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학문에 있어서는 이기설이나 사칠논변(四七論?)은 이황의 이기원론에 근거를 두고 변증을 시도하려 하였다. 저서로는 <겸암집>이 있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