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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영춘의 역적묘
작성자 관리자
내용
- 소재지 : 영춘면 사지원1리 비마루
- 년   대 : 조선중기
- 제공자 : 영춘면 사지원2리 김현수(85세)
- 제보자 : 윤수경 (1983. 8. 11)

영춘군 현내면 읍내에 남태종이 현감 밑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아들이 3형제가 있었는데 첫째와 둘째는 글 공부도 하지 않고 전국 유람과 방탕 생활을 하여 가정을 잘 부리지 못하여 항상 아버지로 부터 야단을 들었고 막내 아들은 그래도 아버지가 시키는대로 글도 읽고 친척과 마을 노인과 이웃 사람들로부터 칭송 받으며 장성하였다.
아버지가 병이 들어 죽기 전에 막내 아들에게 유언하기를 첫째와 둘째는 고향에 살지도 않고 방탕생활을 하고 있으니 마지막 너에게 희망을 걸고 가문의 운명이 달린 일이기에 너에게 유언한다면서 꼭 시키는대로 하라고 몇번을 당부하고 유언 하기를...

"나의 묘자리는 태화산에 있다. 꼭 산을 사서 묘를 쓰되 표시해 둔 자리에 역장(거꾸로 묘를 씀)하고 나의 시신에는 돈있는 사람이 명주를 쓰나 나는 절대로 명주는 한오라기도 쓰지 말고 삼베만으로 나의 수의를 할것이며, 묘 앞에는 반드시 연못을 파고 항상 물이 고이도록 할것이며, 묘의 양옆에 적두팥 3말씩을 밤에 누가 보지 못하게 가만히 묻고, 돈이 없을 터이니 망부석 대신 소나무로 말을 깍아 세우고 두면 어느때인가는 이것이 움직일 것이다. 이 움직이는 목마가 비마루에서 세터를 왕복하고 하루밤을 자고나서 이 말을 타고 서울로 직행하면 군사가 물밀듯이 모여 들 것이며, 이때 꼭 한양의 수문장 이대장을 만나 문을 열어 주고 도망하도록 사전 협의하라"고 유언하고 숨을 거두자 아들은 무슨 영문인지 알수 없으나 나라에 큰 변란과 관계되는 것 같고 또 마지막 임종시의 말이라 들리는 말도 있지만 안들리는 말도 있어 고심하다보니 두분의 형이 아버지의 부음 소식을 듣고서 찾아와 장사 지낼일을 협의 했는데 평소 유언한 비마루로 장지에는 합의가 되어 막내도 형들이 순순히 들어 주어 역장 이야기는 하지 못했다.

수의를 입히는 과정부터 문제가 발생하였다. 큰 아들이 평생에 네가 아버지 따뜻한 옷한벌 제대로 못해드렸으니 마지막 가는 길에 명주바지 저고리를 한벌해서 입힌다 하자 동생이 나서서 아버지의 유언 이야기를 했으나 맏상주라는 힘으로 밀어 붙여 명주를 쓰게 되었다.

장일날 하관 시간에 또 3형제의 싸움이 벌어졌다. 아버지의 유언으로 역장을 하자고 막내동생이 이야기 하나 형 둘이서 조금도 양보하지 아니한다. 싸움이 자꾸 커지니까 마을 사람들이 형의 편을 들며 빨리 결정하라! 우리가 형제 싸움을 구경하러 왔나! 이러다간 오늘 하관 식은 커녕 내일도 못하겠다고 막내를 나무라니까 둘째는 나는 바로해도 중간, 거꾸로 해도 중간이니까 형과 동생이 알아서 하라고 빠지자 둘이서 언쟁을 하던 중 마을 사람의 조언으로 결국 형이 이겨 묘는 머리가 산으로 가도록 바로 쓰게 된다.

동네 사람들은 몇삽식 연못을 파주고 인근에 물을 길러다가 부어 주어 연못을 이루고 목마도 깍아 세워 아버지가 유언한것 중 두가지만 제외하곤 다 이루어졌다. 그러나 외관상으로는 유언이 100%이루어졌다.

이 묘를 쓸때에 처남 정희양(장군)이 묘앞 상석을 군관나루에서 질머질 사람이 없다고 하자 뛰어 내려가 강가 배에서 들어 내어 옆에 끼고 올라와 묘판앞에 놓았다 한다.묘를 쓰고서 2년 만에 묘바람이 났다. 무사 300명을 거느리는등 세력이 있고 군력이 나오기 시작했다.

사병 300명을 거느리고 늘 훈련을 하면서 서울의 수문장 이씨를 생각해 내었고 사람을 보내어 수문장과 교분을 갖게 되었는데 하루는 백마가 남태종의 집 근처를 빙빙 돌아 아버지 유언이 생각나서 얼른 먹이를 주었더니 먹지 아니하고 집을 나가 버렸다.

이때부터 아버지의 유언과 모든 것을 결부시켜보니 한양을 공격하여 대권을 잡으라는 것이 분명해지자 서울로 진격할 것을 결심하고 말이 다시 집에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차 말이 나타났다. 말이 나타나 하룻밤을 잔 후에 진격하라고 했는데 급하고 또 모든 계획이 탈로날까봐 영춘을 출발하면서“썩은 정치 갈아보자 아무리 못살아도 이것보다는 나을 것이다.”하여 제천까지 오는데 5천여명의 군사가 운집했고 처음에는 원주로 가려 했으나 강원도이고 통로의 정찰의 어려움이 있어 충청도 도청이던 충주를 우회하여 목계나루를 건너려고 하는데 소낙비와 우박이 내려서 도저히 도하 작전을 하지 못하고 목계나루에서 유진하게 되었다.

이때에 목계를 중심으로 하여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소낙비와 우박이 내려 삽시간에 도랑물이 불어나고 계곡수가 합류되어 흙탕물이 일어나 강물이 줄지 아니하자 군사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30리밖에는 햇빛이 쨍쨍 내리 쪼이는 가뭄이고 해가 난다는데 우리 지역만 왜 비가 오고 구름이 있지, 소낙비에 젖은 옷이 차가와 지고 먹을 양식을 절약하다 보니 불평의 소리만 높아지고 충주에서 합류할걸로 예상했던 병사들이 합병되지 아니하자 참모진도 술렁이기 시작했다. 또 어떤 참모는 어제에 내린 소나기와 우박으로 소가 죽었다며 이는 필연 우리의 거사와도 무관하지는 않다. 소는 농경사회에서 사람과 비슷했으므로 동요를 막을 길이 없었다. 다급한 남거사는 도하작전을 강행하려 했으나 군사들의 동요와 강심과 유속을 모르므로 절대로 안된다고 하다 보니 3일이 흘렀다. 군사들도 긴장이 풀린 상태였다.

서울에서는 수문장과 내통한 천병이 서울 입성을 기다렸으나 3일째 소식이 없자 수문장이 의금부에 자초지종을 진술하자 의금부에서 왕의 허락을 받아 충청도와 강원도에 병부를 발부받아 병조의 참모가 떠난 후 관군이 충주쪽과 원주쪽으로 나누어 진로를 차단하려 했으나 충주 목계에 있다는 전갈로 장호원서부터 관군이 정비되어 목계나루에서 정오에 대진하게 되었다. 관군이 먼저 목계나루를 기병이 여울로 도하하고 배와 널판지 땟목을 타고 도하하고 활을 쏘아 여막을 불지르고 총통을 2 - 3발 발사하니 5천여명의 군사가 혼비백산하고 300여명의 심복만이 남아서 관군에 포위되었다.

관군의 지휘관이 너희들도 칼과 활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다면 더 이상 죄를 묻지 않겠다. 그러나 남는자는 국법에 따라 처벌하겠다 하였으나 끝까지 300여명의 군사는 움직이지 않았다 한다.
관군이 지휘자의 명령에 따라 쇠도리깨를 휘두르고 화살을 퍼붓자 흩어지기 시작하자 남은자를 포위하니 겨우 50여명이 남아서 주모자를 가려내니 주동자(남태종의 아들)가 나섰다. 지금은 군사지도와 작전장교가 있지만 그때는 관상감이 종군하며 지형지물을 살피고 사람을 쓰는 일은 관상감이 맡았다.

관상감이 주동자(남태종의 아들)를 살펴보았으나 이 사람으로 보아 역적을 모의할 큰 인물은 못되고 필히 부모의 산소가 잘들어 음덕으로 역적을 모의하게 되었으니 이자의 부모 묘를 파서 목을 치는 부관참사형(죽은 사람의 묘를 파서 목을 치는 형)을 집행해야 한다하여 정식으로 조정에서 관원이 나와 영춘 사지원 비마루 현장에서 형이 집행되었다. 형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기이한 일이 발생하였다. (당시의 현장 망부석과 석등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먼저 묘를 파기 전에 석등과 묘석판을 쓰러 뜨렸으나 석등은 깨어져 200여m 하단부에 하나가 있고 석등 기초석은 그 자리에 있다. 봉분을 해체하자 갑자기 안개가 자욱해지고 맑던 날씨가 갑자기 흐려지기 시작하자 관원이 독촉하여 많은 사람이 흙을 걷어 내자 학 두 마리가 안개속으로 높이 솟아서 태화산 쪽으로 날아가자 일제히 활로 학을 겨냥하고 활을 쏘았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군사를 풀어 학 두 마리를 잡아 오도록 명하였다. 근처 10리를 샅샅이 뒤졌으나 찾지 못하고 흰 명주실이 나무에 걸려 있어 실을 찾아가자 학이 가마소폭포밑에 숨어 있어 활로 쏘아 두 마리의 학이 죽었다 한다.

그러나 시신이 있는 흥대를 열자 흰 연기가 크게 나더니 용 한 마리가 크게 울며 산으로 날아올라 가기 시작했다. 이때 관원들이 창과 칼로 용을 찌르고 칼로 치기 시작했다. 100여m를 날아가던 용도 바짝마른 산에서는 힘이 없어져 드러눕기 시작하자 쇠도리깨와 철기로 마구치고 용의 눈을 창으로 찔러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자 안개가 걷히고 커다란 용의 형상이 나타나고 햇빛이 밝게 비치자 점점 사람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용의 비늘이 다 생기고 여의주도 생겼다 한다. 그대 당시 아쉬움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는 거꾸로만 묘를 썼으면 묘 앞에 파놓은 연못에서 물을 머금고 하늘로 승천하거나 남한강으로 가서 승천할텐데 바로 써서 산으로 올라가 목이 말라 죽었다며 아쉬워했고 묘 옆에 묻어둔 팥을 파보니 조그마한 사람의 형상으로 변하고 있어 이것이 후일 도움을 주는 사병이 된다 하여 모두 불을 해 놓고 태웠다 한다.

그래서인지 이곳 묘근처에는 묘가 무척 많이 있다.

그러나 상석과 깨진 석등은 기초는 아직까지 건드리지 아니하여 보전되고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나 신라 의상대사가 전국의 10개의 사찰을 지을 때 지었다는 비마사는 이곳과 100m 거리에 있고 대한불교 천태종 총본산 구인사를 이곳에 창건하려고 1950년대에 초대 종정 스님이셨던 상월원각 대조사가 이곳 길지를 살 돈이 없으므로 희사하면 평생 먹고 사는데는 지장이 없으니 희사하라고 여러번 종용했으나 조○○씨에 의하여 여러차례 거절당하자 현 백자리에 대한불교 천태종 총본산 구인사를 건립했다고 한다.

이렇게 풍수지리에 이름 높은 지역이라 임진왜란때 출병했던 이여송의 좌장군이었던 천만리는 정유재란때 조선에 나와 가지 아니하고 비마루에 살면서 영춘 향교에 많은 책과 후학양성에 힘썼다는 기록을 볼 때 상당한 길지임에는 틀림이 없다
등록일 2007년 12월 26일 19시 49분 24초
수정일 2014년 10월 4일 23시 45분 25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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