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우화교 기사비 |
---|---|
작성자 | 관리자 |
내용 | |
옛날에는 홍수가 났다하면 컸다. 그래서 다리를 안놓을 수는 없구, 건너 다니는 돌다리는 물이 줄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어려움이 있지. 이 우화교는 단양 읍내를 연결하는 다리기도 했지만 죽령고개를 넘어온 경상도 사람들이 다리를 건너서 충주쪽으로 많이 가는 대로(大路)의 큰다리야! 나무를 베어서 다시 놓는 꺽쇠로 고정하고 동바리를 바쳐서 건너 다니는 다리가 물이 나가면 부역을 내어서 다시 놓는 것이 고작이였지. 그리고 양쪽의 난간은 전혀없지. 나무로 놓았으니까 발이 빠지기도 하고 술을먹고 헛디뎌서 떨어져 다치고 죽은 사람이 많았지! 지금은 배에 기름기가 있지만 그때는 삼시 입에 풀칠하기 어려운 때니까 그래서 의견을 모아서 명명한것이 우화교이지 또 혹시나 다리에서 떨어지더라도 날개를 달고서 사뿐히 떨어지면 무사할거라는 생각도 깔려 있었지. 그래서 그런지 우화교라고 명명한 후로는 다리에서 떨어져 다치는 사람은 있어도 죽은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고 하는 구만. 그래서 그때부텀 우화교가 된기여, 그리고 이 비문을 단양서 판독하는 이가 없어 젊은이들이 판독해야 된다고 한다. 체보자주 : 우화교 기사비는 지방 문화제 80호로 지정되어있고 조선 영조 29년 (1753) 제 108대 단양군수였던 이기중선생이 단양천에 건립하고 비는 1754. 6. 15일에 세웠다. 문화제 공식 명칭은 우화교신사비이나 탁본하여 판독한 결과 우화교기사비였으며 이비석을 탁본하여 원본을 확인한바 비문을 쓴 사람은소화선인 宜寧 南有容이며 교량현장 감독 설게자, 목수, 석공, 재정건립자 승려들이와서 준공식에 염불을 하는등 재미있는 비석이며 단양의 명품이다. 우화교의 비문을 탁본하여 수소문하여 원문을 실었다. |
|
등록일 | 2007년 12월 26일 18시 55분 25초 |
수정일 | 2010년 8월 4일 14시 5분 38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