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희망이 있는 살기좋은 단양
단양지역은 인류의 선조로 하여금 선사문화를 발달시키게 하는 풍요한 삶의 터전을 제공하였다. 남한강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동굴 금굴은 70만 년 전부터 3천 년 전까지의 고른 유물층을 가지고 있어 선사문화연구의 표준 유적이 되고 있다. 수양개 지역은 원시 혁명의 도구인 석기 제작소가 50군데나 발견된 세계적인 규모의 선사유적으로 "수양개와 그 이웃들"이란 주제의 국제 학술대회를 통하여 되살아나고 있다. 금굴에서 머지않은 곳에 위치한 구낭굴 유적과 상시 바위그늘 유적에서도 인류문화 태동의 흔적을 쏟아내었으니 단양은 그야말로 인류문화의 발상지라는 이름에 하등 손색이 없는 고장임에 틀림없다.
단양은 삼국시대 초기에는 백제의 영향권에 있었으나 고구려가 남하하면서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가 후에 신라의 영역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특히 고구려에서 신라의 영역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많은 전투가 있었다. 신라 진흥왕은 적성(단양)을 공략하여 탈취하고 이를 기념하여 단양신라적성비를 세웠다. 비의 내용에는 적성 사람 야이차가 신라를 도운 공로로 포상 받았다는 내용이 함께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의 장수 온달은 잃어버린 고토를 회복하기 위하여 출정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아단성(온달산성) 아래에서 전사하였다. 이처럼 단양은 고구려-신라의 접경지로 오랜 기간 대치하였던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고려 충렬왕 때에 현민이 합단의 침입에 맞서 싸운 공로로 감무가 설치되었고, 충숙왕 5년에는 군으로 승격되어 단양군 지사가 파견되었다. 단양 장씨, 단양 우씨 등을 중심으로 고려 후기 융성했던 문화상이 적성 현곡에서 발굴되는가 하면, 특히 우탁은 역학에 정통하여 역동 선생으로 불리며 유림의 근본이 되었다,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은 우리 지역과 든든한 이연의 고리를 만들었으며, 명종조 황준량은 상소를 올려 세금을 감면시킴으로써 도탄에서 백성을 구한 목민관의 모범을 보였다. 김홍도, 정선, 최북, 이방운 등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조선의 화가들이 단양의 명승을 그림으로 그려 남겼으며, 이황, 이이, 정약용, 권섭, 김병연, 김정희 등 당대의 명현들이 시문과 기행문을 남겨 단양의 경승을 칭송하였다. 그야말로 단양은 풍류 명현의 마음의 고향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