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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장마에 배를 맬 느티나무
작성자 관리자
내용
  - 시 대 : 조선인조  

지금부터 350여년전인 조선 인조때 이야기로 현재 느티나무가 조그만했을때의 일로서 나무 아래서 장기와 바둑을 두는 사람, 일하다가 휴식하며 낮잠을 자는 사람, 마을의 여러 사람들이 좁은 정자나무 그늘을 서로 차지하려고 하고있었다. 강물과 느티나무와의 사이는 5∼600m 되는 거리로서 강변의 흰모래와 잔디밭에 매어 놓은 우양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또, 강변은 자갈밭이므로 쉴만한 자리가 그리 없었다.

예로부터 소금배의 정착지가 출발지이기도 했다. 수상교통의 요지이며 삼도의 풍유객과 잡상인이 몰리기도 했었다. 또 뗏목과 띠배의 종착·출발지였으므로 영월, 정선, 평창, 강원도와 풍기, 부석, 소천, 경상도와 충청도 각계·각층의 사람왕래가 많았던 곳이며, 영월, 영춘의 선비들이 봄, 가을 즐겨 찾아 풍류를 읊던 곳으로 장원시를 뽑아 차배에서 뱃놀이하고 북벽에 각서해서 유생들이 집합소이기도 했다.

당시 수령 2∼30년밖에 되지 않는 작은 나무 그늘아래서 장기를 두는 젊은이에게 스님이 혼자서 중얼거린다. "이곳이 용나루라 용나루라! 그렇지만 용은 승천하진 못하겠구만 나룻배가 논밭을 지나가겠구만" 청년은 그게 무슨 말씀인지 자세히 이야기 해달라고 하자 스님이 "빠르면 5갑자 늦으면 6갑자에 천지개락을 한번 할거야"

"이 나무를 잘 키우면 그때 이 나무에다가 저 강변에 매어둔 배를 맬 날이 올 것이며 또 저 배가 없어지자면 개락이 일어난 후 십년이나 이십년 후면 저 배도 없어지고 나루도 없어 질 것을 예언해 주었다. 그리고서 마을 사람들이 이 나무를 잘 가꾸어 두시오 또 나무에 피해를 입히는 자는 나무에 피해를 준 것만큼 신체의 어느 부분이라도 손상을 줄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있던 한 사람이 화를 내면서 스님을 나무란다. 조용히 사는 마을에 민심만 동요시키는 처사라며 화를 내면서 따진다.

5∼600m 강가에 있는 배가 논밭위로 다닌다며 마을 전체가 물바다가 되고 논밭도 못쓰게되고 5∼6갑자 후에 마을이 없어진다는 것을 생각하니 마을의 망함을 예언하는 처사라서 질문하던 젊은 청년과 술기운이 도는 주민이 합세하여 "미친놈의 땡초중 배고프면 밥 동냥이나 할 것이지 남의 동네 망치는 이야기만하고 다닌다"고 붙잡으려고 일시에 덤벼들자 "두고보아라 내말이 거짓말인가 나중에 내말이 맞을 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야"하며 마을 사람들에게 안잡히려고 마을쪽으로 향하여 달려갔다.

그중 한 사람이 혹시 이인이 아닌가하고 의심스러워서 마을로 들어와서 노승을 본 사람이 있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전혀 본 사실이 없고 오히려 이 사람이 낮잠 자다가 잠이 아직 깨지 아니한 잠꼬대 인가하고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하는 지라, ‘음! 과연 그 스님은 보통 사람이 아니고 틀림없이 도사일거야 도사 말이 맞어, 나혼자라도 한번 잘 가꾸어 보아야 된다 ’라고 생각하고 한 사람이 보살피면서 집안의 고민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고 정월달과 가을에 마을 수호신으로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고 나무에 정월달에는 제사를 지낼 때까지 금줄을 쳤다.

마을 사람들은 절 받은 나무라면서 가지를 자르거나 해하지 아니했다. 그후, 350여년간 아름드리나무로 성장했고 또, 6.25 사변을 전후하여 나무를 괴롭힌 사람은 피해를 보았다. 20년전만 하여도 이 나무 아래서 모내기 점심밥을 나누어 먹고 제사도 성행했다. 가물 때면 기우제도 지내고 마을에 팻물을 댈 때면 의례히 기우제를 지내고 팻물꾼들의 교대가 이 느티나무 아래서 이루어 졌다.

나무로 인하여 피해를 본 사람은 마을에 사는 조씨가 나무를 베어서 집에 땔감으로 이용한 후, 집안에 좋지 아니한 일이 자주 생기고 아들 둘이 모두 미쳐서 5년 동안에 모두 사망했으며 김모씨는 정월보름날 이 나무가 그리 신통한지 내가 한번 시험해 보겠다면서 고목나무에 불을 지름으로서 나무꼭대기까지 연기가 나서 다 죽은 줄 알았던 느티나무가 겨우 살아났고 신병으로 3년간 고생하다가 죽고 말았으며 유모씨는 나무에 불을 놓아서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큰소리 치며 살다가 이 마을 떠나서 불을 놓은 지 3년만에 교통사고 사망함으로서 나무를 베거나 해하지 아니했다.

마을 안길 포장 때에도 나무를 그대로 두고 포장하여 현재는 잘 보호하고 있다.

전설과 예언이 맞는 연유를 생각해보면 '72. 8. 19 수해 때에 단양, 영춘지역은 많은 비기 내리지는 아니했다. 영월, 평창, 정선, 주천지방에 '72. 8. 18∼8. 19 320m/m의 집중호우가 내려 영월의 동강철교에 미루나무 와 초가집이 떠 내려와 동강물을 막았고, 서강쪽에서 내려온 폭우에 떠내려온 뿌리째 뽑힌 나무가 동강 인도교에 걸려서 영월이 완전 침수되고 잠수된 수압에 의하여 동강철교와 동강인도교가 유실되면서 직선거리 16㎞의 용진나루에 급류가 들이닥쳐 25호의 가옥이 침수되면서 남한강 물이 불어나기 시작하자

마을의 유일한 교통수단인 나룻배를 주민이 끌어올리고 관리하다 보니 강가에 큰 나무는 다 물에 잠기고 강나루에서 5∼600m 떨어진 하나밖에 없는 느티나무에 나룻배를 매어서 이 마을에 유일한 교통수단인 배를 떠내려보내지 아니하고 살렸다.

이날 주민들은 그날 노승에 말을 잘 듣고 몰매를 주지 말고 홍수를 예방할 수 있는 방법과 대처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으면 재산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텐데 하고 1차로 예언이 맞았음을 입증했고 2차로는 수해가 난 후, 20년 뒤인 '83년부터 북벽과 밥재길을 개설하여 시내버스가 들어옴으로서 뱃길을 찾는 사람이 없어졌고 배도 완전히 사라져서 노승의 예언이 모두 맞아떨어졌다는 이야기다.
등록일 2007년 12월 26일 19시 40분 23초
수정일 2014년 10월 4일 23시 59분 33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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