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중 단양인으로서 이름난 의병장은 날아 다니는 김규철의병장으로 영춘군 현내면 보발리(현.가곡면 보발리)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청풍김씨이다.
1907년 궁내부주사로 관직에도 있다가 우리나라 군대가 해산되자 고향으로 내려와 이명상, 박여성과 합세하여 소백산과 금수산을 근거지로 의병활동을 했다고 적고 있으며, 알려진 의병이나 알려지지 아니한 의병이 있으니 그분이 바로 김상태 의병장이다.(1907년 이 유인석의병은 논하지 않았음.) 호는 백우, 자는 경육, 족보에는 상호로 기록되어있다. 출생지는 단양군 영춘면 남천리이나 일본군 토벌대장 무나다따대위가 쓴 기록에는 강원도 영춘군 현내면 남천동이라 했다. 단양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영춘면 남천리에서 보냈다.
백우는 뛰어난 의협심과 총명함이 남달라서 어린시절부터 마을 어린이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유년기를 지나서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옥동리로 이사하여 더욱더 한학에 정진하며 후학교육에 정성을 쏟아붓자 백우를 중심으로 많은 학자와 인품을 겸비한 유생들이 모여들어 학문도 논하고 또 일본이 여러나라 침략하려고 하고 있다는 구한말의 급변하는 정세
즉 갑신정변(1884)과 동학혁명(1894)에 관한 일본의 진압처사와 관군의 진압과정 을미사변(1895)등에 대한 구국활동을 이대로 좌시할 수 없다하여 30세에는 동학혁명에 참가하여 일부장으로 지내다가 일본군과 관군의 진압으로 가라앉아 이제는 후학교육에 힘쓰며 향교에 나가 유생들에게도 나라의 주권과 국운을 바로 잡는데 앞장서야 된다고 하지만 서도 후학육성에 정열을 쏟는다.
김상태 의병장은 을미의병(1895) 봉기때부터 을사의병(1905)을 거쳐 의병항쟁사 최대 전투였던 단양죽령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간다.
이는 단양에서 태어나 소백산 아래 살아서 지역 지형에 능했으며 일본군의 진입로 차단과 의병의 전투 및 공격과 후퇴 군사배치등 지형지물을 최대한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상태 의병장은 1980년 6월 24일까지는 한사람의 의병으로서 이름조차도 거론되지 아니했다. 일본 고베 전 일본군 경북 영주 수배대장이던 일본군대위 무나가따가 보존해온 것을 신호시에 사는 아들 종편극(83세)이
“한국에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 김선생의 유족에게 돌려주고 싶다.”하며 고베 한국총영사관에 가져와 유물을 찾아 주도록 요청하면서 “어머니의 짐을 정리하다가 발견했다.”고 하였지만 늦었으면 고베지진때 타거나 땅에 묻혀졌을 자료인지도 모른다. “당시로서는 나라를 위한 입장이었겠으나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가 한 일이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김선생의 유족을 찾아 줄 수만 있다면 빨리 돌려주고 싶다.”고 간곡히 말했다고 한다.
김상태장군을 알려면 먼저 도창의 대장 이강년 의병장을 알아야 한다. 이강년대장 바로 아래 부대장이 중군장 김상태이다, 1907년 40여명의 부대장이 모여서 도창의대장에 이강년이 취임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극구 사양했다 한다. 이때 제천의림지 영호정에서 회식을 베풀 때 이강년이 “반드시 인격과 지위가 겸비된 이를 골라서 도창의대장으로 추대해야 할 것이요. 구차스럽게 장시간 맡을 일은 아닙니다.”라고 사양하며 기피하자 (8.19) 김상태가 사군(제천,청풍,단양,영춘)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강권하기를 “공이 만일 끝내 여러 사람들의 소망을 저버린다면 모든 것을 그만두고 돌아가겠소”하니 이강년이 부득이 도창의대장 자리를 허락하고 장병들의 군례를 받은 뒤 이강년의병 부대의 편성을 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8월 23일 저녁때 태장동에 이르렀고 이위승의 집에서 유숙하였다. 이때 「국수원류」1편과 「군계」12귀 그리고 「통고문」1장을 지었는데 글이 엄하고 의리가 정연하였다.
증산, 월악리, 제억령, 단양궁동 등을 거쳐 풍기 도촌에 이진하였다. 도촌에서 일진회원 김상호와 민간에 폐단을 끼친 김기찬을 죄를 들어 선포하고 처형하였다.
여기에서 면장은 찬조금(2백10량)을 내었고 봉황사에서는 식사를 정성껏 냈다. 은풍(풍기 동북)에 이르러 읍의 적의 동태를 탐지시킨바 왜적이 영주로 철수했다 하므로 추격을 단념하였다. 다시 문경방면으로 진입하여 적성,평촌(평천리)에서 리정으로 귀환하고 청풍 조동교의 군사와 합진하였다. 그리고 금룡사,용연을 거쳐서 당포에 유진하였다.
9월 10일 노수에 나갔던 정탐군이 보고하기를 도망치는 왜놈머리 4개를 베어가지고 온다하므로 중군장 김상태로 하여금 적을 추격하여 연작실에 이르니 적은 이미 석현관으로 나갔다. 점심때가 지나서 다시 괴성으로 향하여 노목 뒷골에 이르니 대진의 군사들이 적의 머리를 매달고 부상한 우리군사 3명과 함께 옹기점골에서 나옴으로써 놀라서 물으니 적이 풀숲 사이에 잠복해 있다가 총을 쏘아 3명이 부상한 것이라한다.
적의 목을 인수하고 진을 합친 다음 야분령을 넘어 저녁에 마곡에 이르니 의원 조성언이 음식을 많이차려 후하게 대접하며 약물을 선사했다. (창의록 융회원년 8월 임술일조)
9월 15일,후장군 신태원이 적성에서 싸우다 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만원에게 명하여, 천보락 이하 7명을 거느리고 적성으로 가서 적에게 죽은 사람 36명의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내게 했다. 이강년 본진은 배음사,단양 성금령을 넘어 동가리점에 도착했는데 관동장 이인영도 따라왔다. 보산 원도상의 집에 이르러 적을 공방하는 비계를 의논하고 야간 행군으로 상보산에 이르러 유진 하였다.
이상의 「창의일록」과 일본군측 기록을 대비한 문경 갈평과 적성에서의 전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강년 부대는 갈평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나, 일본군의 추격을 피하면서 적성전투에서는 후군장인 신태원 부대가 참패를 당하였다(9.15). 둘째, 일본군은 갈평리 전투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성과를 거둔 적성전투에서의 기록은 상세한다. 단 일자에는 차이가 있다.
9월 18일, 단양 영춘읍에 유진하며 군수물자를 보충하였다. 이때 단양 의병장 이명상과 진을 연합하였으며,소모장 원건당이 삼척에서 모군하여 왔다. 20일에 청풍 의병장 조동교가 전일의 과오를 뉘우치고 합진을 호소해옴으로 허가 하였다. 22일 추석절로서 집이 가까운 총군들에게 휴가를 주어 '명일은 추석이니 가서 부모와 처자들을 위로하라'하며 돈 1백문씩 주었다. 24일에 남천으로 이진하고, 25일에 적이 온다는 보고를 받고 운강 자신이 유 로 나가며 조동교로 하여금 뒤따라오게 하였다.
25일 「창의일록」의 전황은 다음과 같다.
몇 리를 못가서 적이 이미 골짜기 어구에 와 우리 군사를 포격하였다. 우리 군사가 고개 위에서 총을 쏘았으나 거리가 멀어서 총알이 적에게 미치지 못하고, 겸하여 날은 캄캄하게 어두워졌다. 그래서 퇴각하여 성곡(남천리 성골)에 주둔하였는데, 적이 읍의 관사나 가옥을 불태우니 연기와 불길이 하늘에 치솟았다.
성곡으로부터 다시 단양,청풍의 별초군 및 우선봉군을 거느리고 적을 추격하여 읍밑에 이르니 적이 납태촌(상2리 느티)에 불을 놓고 영월로 달아났으므로 추격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주민들이 적을 무서워하여 움직이지 못하다가, 우리 군사가 이르는 것을 보고 서로 부르며 좋아하는데 그 정상이 매우 측은하였다. 운강이 주민들을 불러 순순히 타이르고 물러나 최가동(백자리 온달성 아랫마을)에 머물렀다가 남진을 건너 비마(사지원2리 비마루)의 천국환의 집에 이르렀다.
단양 영춘지역전투에 대한 일본군측 기록은 다음과 같다.
국지대좌는 그 제3대대장 강택소좌가 인솔하는 제11중대(1소대 결) 및 제12중대에게 명하여 24일 영천을 떠나 영춘,영월방면을 소탕시켰다. 25일 저녁 영주를 수비하고 있던 서강중대는 죽령을 넘어 영춘으로 진출하여 그곳에서 약 3백명의 폭도와 충돌,교전 약 1시간 후 그것을 궤주시켰다. 이 폭도는 이강년이 지휘하는 집단으로 원주,안동 진위대의 해산병을 가담시키고 있는 폭도로 우리의 맹렬한 추격에 의하여 지리멸렬, 사상 약50을 유기하고 산간으로 도주하였다.
이상의 「창의일록」과 일본군측 기록을 대비하여 보면 일자나 지점은 대체로 부합하나 일측 기록의 전과는 과장된 것으로 사료된다.
28일에 단양,청풍 두 부대와 함께 영월 조전(사지원2리 어은동 경계)에 도착하였다.
영월 장릉동 어구에 주둔하여 그동한 행실이 극히 망측한 청풍의병장 조동교를 목베고 난동하는 군사3명을 처형하였다. 그리고 바로 영월읍에 주둔하였다.(9.29) 다음날 녹번리,성환, 동내리에 내려와(10.1) 험한 곳을 의지하여 적을 치려다가 중지하고 거석리로 이진하였다.(10.3)
10월 4일에 각 부대에 분부하여 영월 적 병참을 공격케 하였다. 그리하여 진평, 진양에 진주하여 유숙하고,6일오전 4시경에 새벽밥을 먹고 10리를 행군하여 덕포 독산(여우고개)에 진을 쳤다가,날이 밝자 먼저 공격하였는데 적이 움직이지 않았다. 우선봉 백남규가 단신으로 적의 병참 앞에 뛰어들어가서 초가에 불을 지르니,적이 창절사 뒤 산기슭 구덩이에 들어가서 몸을 감추고 응전하였다. 앞서 좌군장 이용노와 좌선봉 하한서가 곧장 앞으로 나가 무찌르지 못해서, 적이 먼저 험한곳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드디어 오전 8시부터 정오까지격전을 벌였으나 적은 끝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중군장 김상태가 군사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가 칼을 휘두르며 돌입하였으나, 적이 공청 안에 숨어서 탄환을 퍼부으니,단신으로 대적할 수 없어 환군하여 덕포를 건넜다. 날은 저물고 비는 퍼부으며 화약 탄환은 다하게 되었으므로 각동으로 퇴군하면서 느티,휴석동,느릅실,백자,어의곡,마조,장현을 지나 다음날 두음산에 주둔하였다. 10월 9일 용진에서 정탐군 충주 순검 1명을 총살하고 행군하여 북진(북벽 나루마을)을 건너 여의천,원곡(멀골)에 유숙하였다. 10월 12일 총독장 이만원과 우군장 이중봉,선봉 권용일로 하여금 군사 수백명을 거느리고 괴산군 연풍의 적을 치게하여 4명을 죽이고 3명을 사로 잡았다.
15일에 전 정언 김상한이 십수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 지휘받기를 청하므로 운강이 굳이 사양하였으나 여러 장수와 참모들도 간청하므로 그를 별진장으로 임명하였다.
상산진(향산리 마을앞 매주바위 앞 옛날 나루터)을 건너 심곡, 임현, 사기막 (석교1리),원주 신평 그리고 제천 송한에 주둔하였다. 20일에 도용동에서 전군장 윤기영을 만나 도천에서 소모장 주광식이 합류(90병사)하므로 후군장으로 임명하였다.
21일 전군장 윤기영이 역촌에서 보고하기를 선유위원 권태준이 말을 달려 지나간다는 말을 듣고 곧 잡아오게 하여 적의 정세를 캐어물은 즉, “선유사 홍우철이 왜병 2백명을 데리고 신림에서 자고 있는데 내일 유치를 넘을 것이다.”고 하므로 운강은 그를 “시각을 지체말고 베어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22일 닭이 울무렵에 우선봉,백남규,좌선봉,하한서,우군 선봉 권용일을 명하여 상유치로가서 나누어 복병하게 하였다. 산이 깊고 골짜기가 좁은데 겸하여,안개와 비가 뿌려져 지척을 분별할 수 없었다. 적의 선봉 부대가 먼저 복병 초소를 지나가자 선봉이 먼저 발포하고,이어 좌우 편에서 일제히 발사하였다. 운강이 포성을 듣고 중군,총독과 함께 본진의 군사를 거느리고 크게 호령하며 독전하였다. 또 별진의 정병에게 명령하여 응원하게 하고, 다시 전군을 급히 나오게 하여 사면에서 포위하고 일제히 공격하니,적은 하나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200여명이 전멸하였다.
오후 4시경에 30리를 퇴각하여 신평에 주둔하고 우변 우변면장을 불러,백성들을 시켜 전선주를 세우게 한 죄를 문책하였다.
이유치 전투에 대한 일본군측 기록은 다음과 같아.
강원도 선유사 일행을 호위하기 위하여 래춘하던 지하육군소위 이하 20명은 선유사와 공히 과반부지로부터...본월 21일...상유치라고 하는 곳에서 폭도 300여명과 출회,전투를 개시하여 적은 완강히 저항하였으나 아군은 맹렬히 사격을 가하여 드디어 오후 6시경에 이르러 차를 격퇴하였다. 이 전투에서 적은 사체 30을 유기하고 부춘천방면으로 퇴각하였다 한다. 그리고 아군에는 사자2명, 부상2명을 출하였을 뿐이다.
이상의 「창의일록」과 일본군측 기록을 대비한 전과,전황은 대체로 부합하나 전사자등의 기록은 상반된다.
「운강유고」의 기록으로 보아 적전사자는 5명으로 사료된다.
10월 24일∼26일 임현에 회군하였다가 가야리(가대리), 다시 단양 도담에 주둔하면서 수일동안 휴식과 정탐을 하였다. 또 후군장 주광식을 영서 7읍에 보내어 소모하게 하였다.
죽령 1차전(11.2) 10월 31일 단양 장림에 이진하였을 때, 적 수십명이 응암(매바위)을 엿본다 하므로,곧 좌·우 선봉으로 태봉동구에 복병하게 하였는데 적이 먼저 달아났다. 이튿날 응암으로 진군하고 또 선봉장을 시켜 위아래 좁은 목을 지켰다가 11월 2일 죽령을 넘어 온 적을 교전하여 30명을 죽여 대승하였다. 밤에도 적병이 와서 엿보는 것을 파수병이 못잡아서 군중이 모두 분히 여겼다.
죽령 2차전(11.6) 11월 5일,야습해 온 적을 맹공하여 격퇴하였는데, 다음날 재침한 적을 추격하여 죽령 아래에서 수백명을 격퇴하였다.(11.6) 즉 오전 10시로부터 오후 4시까지 적과 교전하여 4백명을 무찌르니, 적이 그제야 물러갔다. 다시 좌·우 선봉장을 시켜서 응암 뒷산 기슭에 복병하고,대장진은 기를 날리며 고함치면서 내려가 유도하니,적이 다시왔다. 장차 습격하려 하는데 마침 비바람이 갑자기 일어나서 그만 장림으로 회군하였다. 11월 7일 적이 응암으로 와서 민가에 불을 놓으므로 명령하여 중군장은 왼쪽 산으로 올라가고 우선봉은 오른쪽 산으로 올라가 도전하게 하고, 별초 박갑수로 총군 몇 명을 거느리고 바로 앞으로 돌격하게 하였다. 적이 달아나서 죽령으로 들어가므로,군사를 지휘하여 고리평(괴평리)으로 나와 주둔하였다. 연일 고전으로 사졸들이 모두 피곤해 하므로,하루동안 군사들을 쉬게 하고, 소를 잡아 잘 먹였다. 또 적이 온다는 말을 듣고,좌·우선봉장을 명령하여 사인암 뒷고개에 복병하게 하였다.
죽령 3차전(11.10) 11월 10일 동틀 무렵에 적이 들어오므로, 운강이 나가 싸워 적 80명을 잡고 말 1필을 얻었다. 적이 달아났는데 우리 군사도 수십명이 부상하였다. 다음 11일에도 적이 크게 협공해 옴에 우리 군사는 소백산 마루로 달아나는데 운강이 뒤를 막고 바위 아래 앉아 각군에 엄한 호령을 내리니, 두 선봉장이 포군들을 독려하여 바위 사이에 잠복하고 협력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적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므로, 간신히 고개 마루에 닿아 위기를 모면하였다.
12일에 영춘읍으로 퇴군하였다가 며칠 후 수하리(동대리),의풍(의풍)을 거쳐 고치(고치령)를 넘어 순흥으로 진출하였다. 신태식의 「정미년 창의가」의 죽령 전투 가사는 다음과 같다. 토벌대 오백명은 예천으로 넘어오고 수비대 사백명은 원주 제천으로 덮어오고 마병대 백여명은 충주 청풍으로 들어온다. 매바우 유진하고 철통같은 단속할제 기호를 높이달고 헌화를 일금하라 각 장관 취립하고 군령을 전포할제 본진선봉 전세영은 죽령을 방어하고 호좌선봉 하한서는 장임을 수습하고 좌익 우익 돌격장은 서령을 견수하고 전군후군 좌군장은 남태를 칩복하고 사령유격 중군장은 중앙에 유진하되 적병이 승세하니 일시에 포방이라 군령을 어긴자는 사정없이 참하리라 미시말 신신초에 천지가 뒤눈난다 속사포 기관포는 탄알이 빗발이요 천보대 거래대는 소리가 벽력이라 화약연기 안개되어 동서를 남문일네 사오일 지내도록 승패를 불분터니 칩십여전 싸운후에 적병이 퇴진하네 군사를 수습하니 총맞인자 칠팔이라 적병을 수렴해서 수백명 사망일세 죽령 전투에 대한 일본군측 기록으로 「독운 의병자료」3, 〈조선폭도토벌지〉p.720의 '경상북도 및 부근에 있어서의 폭도 토벌 개항표'에 영주 수비대가 11월 3일 죽령 북록에서 폭도 약 400과 싸워 8명을 사살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이상의 제기록으로 보아 의병측이 대체로 기선을 잡고 죽령지역을 장악한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나 11월 11일에는 대적과 싸워 종일 불리하여 다음날 영춘으로 퇴군하였다.
11월 15일,순흥을 습격하였는데 적이 기미를 알고 벌써 달아났다. 그래서 순검의 집3채를 불태우고 군사를 정돈하여 물러나려 하는데,고을 안 백성들이 앞을 다투어 술과 밥을 가지고 나와 노상에서 위로하며 말하기를, “적당 김창수의 독한 학정은 원수인 왜놈보다도 더하여,온 고을이 보전하기 어려우니 머물러서 진압하여 주시옵소서.”하는 것이었다. 운강은 “형편이 오래 머물기 어렵다.”하고 의풍으로 회군하였다.
순흥지구 전투에 대한 일본군측 기록은 다음과 같다.
11월 11일 이강년이 인솔하는 약 3백여명은 영춘방면에서 신돌석이 인솔하는 약 2백여명은 영월에서 같이 진출하여 순흥을 습격하여 그 세력 자못 창궐, 전 읍을 불살랐다.
11월 16일, 거석리에 유진하면서 다음과 같이 부대 편성을 일부 보충하였다.
11월 26일 해뜰 무렵에 1백여명 군사를 거느리고 단양 유치(느릅실)에서 싸웠는데,바라다보니 기치에 연기와 불길이 하늘에 닿았고,또 수하리(동대리)에는 적진이 비어 있으므로,적이 우리 편에서 북병한 것을 알고 어두운 밤에 달아난 것으로 생각하였다. 얼마 후에 흰옷 입은 적 셋이 기치로 향해 오고, 적 둘은 시냇가에 엎디었고, 또 10여명의 적이 대치하여 왔다. 운강이 시험삼아 공격하게 하였으나 적이 응전하지 않더니, 이윽고 적 수백이 도창곡(남천1리 도창골) 상봉으로부터 총을 쏘는데 우리 진은 험한곳을 상실하여 감당할 수 없으므로 그만 부대가 무너졌다.
운강의 맏아들 승재가 운강을 보호하여 한편으로 싸우고 한편으로 물러나서 마대로 퇴각하여 머물렀는데, 따라온 군사가 겨우 수십 명이었다. 다음날(27) 회곡(동대2리 회실)에 도착하고 이어 29일에는 보산에 와 유진하였다.
11월 30일 해뜰무렵에 피화리(보발리 피알기)로 올라갔는데, 오정 때에 적 수 백이 영춘에서 바로 궁동(다대리 궁궐)으로 쳐들어오니, 그 곳에 별진 소모장 윤성구가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가 지자, 최덕장등을 보내어 상산(향산) 나루터를 정찰하게 하고 겨우 동리를 떠났는데, 문득 와서 보고하기를,‘적이 사지원과 가야 두 곳을 단단히 지키고 있어 전진할 수가 없다.’하자, 모두들 실색하고 중군도 두려워하였다.
운강이 부득이 하여 고음사동(보발리 곰절)으로 향하는데 어구를 못 가서 문득 적의 총포소리가 뇌성같이 들리니 모두들 사방으로 흩어져서 호령하여도 막을 수가 없었다. 싸워보지도 못하고 대참패를 당하였다.
영춘 전투에 대한 일본군측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26일 오전 조사중대는 영춘 동남 약 30리 지점인 산령에 도달하였을 때 이강년이 지휘하는 약 5백의 폭도와 조우하여 이것을 공격하여 그 60을 사살하고 북방으로 궤주시켰다.
하야 중위가 인솔하는 1소대는 동일 오후 영춘 남방 약 10리 지점인 산곡에서 폭도 약 2백과 충돌, 그 35를 사살하고 그를 궤란시켰다. 26일 이래 이강년이 인솔하고 있는 폭도는 영월 동방에 집합하고, 그 일부는 영춘 부근에서 출몰하고 있다는 것을 정찰한 조사중대를 영월 방향에서 전진시키고, 실야중대는 고직령 방향에서 영월 동방 곡지를 향하여 행동을 개시시키고, 또 영월·삼척 수비대를 시켜 이에 책응케 하였다.
이 기사의 일자 및 병력 규모와 줄거리가 「창의일록」의 기묘, 계미일조와 거의 부합한다.
일본측 기록은 패전과는 달리 성공한 예일 경우 비교적 자세한 것이다. 12월 1일 밤에 보발을 지나 곰절에 당도하여 흩어진 군사들을 소집하였으며, 2일에 응의곡(가곡면 어의곡리 새밭)에 이르러 적이 온다는 말을 듣고 밤에 다시 행군하여 50여리를 갔다.
12월 3일 ∼ 12일까지의 이강년부대 이동과 그 참상은 다음과 같다.
2일 고음사를 떠남, 어의곡에서 저녁을 먹고 주민의 안내로(적의 작전을 피함) 다리안산(다리안 국민관광지)을 넘어 기도를 타고 나와, 눈 쌓인 고개와 어름 덮인 절벽에 자빠지며 엎어지며 육태령을 넘어 50여리를 가서 두음동에 이르고 3일 새벽4시에 밥을 재촉하여 먹고, 또 가서 해뜰무렵에 황상우와 사인암을 지나 가차산·예천·조전에 당도하였다. 4일에 이웃 당동에 머물렀다. 군사를 소모하여(100여명) 다시 명전에서 단양 궁동에 왔다.
7일에 그간 춥고 굶주려서 행군이 어려웠으나 운강은 ‘반드시 배양산으로 가야만 죽음을 면하게 된다’고 하며 군사를 독려하여 넘어져가면서 올산에 왔고, 8일 밤에(적병 접근 소식받음) 뒷산 고개에 올라 산등성을 돌고 돌아서 도솔봉에 이르렀다, 오후 6시경에 풍기땅으로 넘어왔는데, 비바람이 크게 드리치니 군사들이 나아갈 수가 없었다.
운강의 생각에 적의 병참이 이곳에서 20리밖에 되지 않는데, 만일 큰길로 가다가는 어떤변이 생길지 모르겠으므로 독촉하여 묘적령을 넘게 하였다.
캄캄한 밤에 바람은 세게 부니, 의관을 정돈하기 어려우며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단양 사동으로 향해 가는데 군사들이 모두 길을 잃어 가시밭을 헤치기도 하고, 깊은 골짜기로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먼동이 틀 무렵에야 동구에 이르렀는데, 몇 가구의 민가가 매우 초라하였다. 거기 들어가 지나온 경로를 이야기하고 새벽 밥을 짓게 하였다.(9일)
정오에 떠나서 산행하여 성금으로 향하였는데, 몇리를 못가서 절벽을 만나 새벽 2시경에야 도착하니(10일) 군사들이 모두 지쳤다. 하루를 머무는데 동리 백성들이 좁쌀로 만든 떡과 밥을 먹고 떠나서(11일) 미륵리(수촌리)를 지나 수내촌에 닿았다. 계곡 군사들을 재촉하여 행현(대대2리 설구재)을 넘어 다시 12일 고음사에 이르렀는데, 운강이 너무 지쳐서 밤새도록 신음하였다.
이튿날은 운강의 병이 심하여 그대로 머물렀으며, 파수를 잘 보도록 하고 널리 적정을 탐지하였다. 적이 금곡에서 남산진을 건넜다는 말을 듣고 진을 궁곡으로 옮겼다. 12월 16일 배양산을 가려고 장항령을 넘다가 복상동에서 새벽에 적의 기습을 당하였다.
갈팡질팡하여 임현 서쪽 작은산 기슭의 수림이 울창한 곳에 이르니 날이 벌써 밝았다. 산 아래 작은집을 찾아 내려가서 잠시 쉬는데, 주인이 조밥을 바쳐서 주리고 추운 것을 좀 면하고 곧 떠났는데, 그동안에 몇 사람이 죽고 몇 사람이 생포된지를 몰랐다.
17일 사기막을 지나 주둔·방사지(현,불암사)에 이르러 전황을 보고 받았다. “중군장 김상태는 죽음을 모면한 것 같았으나, 참모 원하정·신숙·신명희와 소모장 이중봉·총군 이달등 10명이 생포되고 전사자 7명이었다.”고 보고하니, 운강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가 거의 한지 12년에 이와 같이 패배한 때는 없었다." 하였다. 그리고 화가나 병이 더쳤다.
12월 18일 덕우산촌(버덕이재)에 주둔하여 흩어진 부대를 재정비하고, 월규에 이진하여서는 좌군과 합세하였으며, 부대를 나누어 한 부대를 철동에 주둔하였다. 25일 월규에서 철동에 이진했을 때 적이 멀리 소오에 나타나매 별초군 신갑노가 부하 10명을 거느리고 강변에 매복하였다가 정면으로 충돌하였다. 이강년은 군사를 지휘하여 월규봉으로 올라가서 한참동안 싸웠다. 총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는 전투였으며, 적을 3명 사살하고 2명을 부상시키는 전과를 올린 것이다.
이강년 부대는 경기지구로 진출하기 위하여 북상의 길을 개척하면서 행군하였다. 이렇게 김상태 의병장은 이강년 의병장의 순국으로 잔여병 충북,강원,경북산악을 무대로 게릴라 전을 펴서 일본군을 괴롭혔다. 1907년 7월부터 1908년 6월까지 1년동안 죽령,서벽 전투등 41회의 대격전을 했다. 이강년의 장임록에는 제1위의 장군으로 이름이 올라 있으며 체포당시 주동자를 물음에 이강년,민긍호와 함께 했다고 했다. 이,민 두장군은 1908년 잡혀 처형 된 후 3년간 수천명의 부하를 이끌고 일본군과 싸웠다.
조서에서 김상태냐고 묻자 김상태(金尙台)라고 고치고 부대의 구성원은 900명이 넘고 총은 700정이었다고 진술했다. 또 주요전투를 말하라하자 안동서벽전투,풍기전투,죽령전투등이라고 했다. 3개 전투에서 일본군은 밝히기를 꺼려 했으나 일본군이 천여명 가까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너는 이제까지 많은 사람을 죽였는데”하고 묻자 “나쁜놈들은 모두 죽였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은 죽이지 않았다.”고 의연하게 대답했다.
신출귀몰하는 김상태 의병장을 도저히 체포하지 못하자 일본군에서 현상금을 걸게된다. 이때 현상금에 눈이 어두운 한국 밀정 ○○○의 제보로 6.14일 경북 순흥군 단산면 광암리(영주시 단산면) 소백산 중턱에서 체포되어 3개월만인 1911년 9월 21일 대구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그때 나이가 50세였다. 교수형을 당하기 전 수갑을 찬 채 정좌하고 있는 모습은 현세대를 사는 우리 단양인만의 자랑이 아니요, 나라의 자랑이다.
김상태장군의 의병비를 건립하자는 여론도 있으나 출생지와 생활근거지도 분분하다. 영월군에서는 사당과 살던 집근처에 표석을 세워서 교육장으로 이용하고 있다. 이 글을 처음 전해준 경찰의 한 관계자는 옛날 것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길이 보존하는 표석정도는 있어야 된다고 강변도 한다.
거 김상태지략전과 체포전말를 구하려고 삼척김씨 문중을 찾았으나 김상태장군이 쓰던 로자리오와 약전,체포전말을 독립기념관에 기증하였다 한다.
참고문헌 : 구한말 의병장 이강년연구(문학박사 학위논문) 인하대학교 대학원사학과 한국사전공 정제우 한국일보(80.6.24)신출귀몰한 항일의병장 김상태선생 사진발견 호서 의병사적(제천군 문화원) 삼척김씨 문중족보 영월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