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마을은 삼국의 국경 분쟁 지역으로서 고구려, 을아단현 신라에는 자춘현 조선대에는 현내면 지역으로서 광해군 6년(1641년)까지 영춘현의 향교가 대어구에 있어 충효를 바탕으로 삼았고 소백산과 함께 살아왔다.
소백산 정기와 은택속에 살아 갈 것이다.
마당재 소금지게 지고 넘고 소고삐 잡아 소천장 보던 영남 호서의 10대 대로의 하나였다.
성골은 온달산성 방어용 산성이 있어 성골이고 대어구는 소백산을 들어가는 문이라 하여 이름을 짓고 멀골은 너무멀어 현감이 원동이라 했다.
1950년대 소백산 원시림이 벌채되기 시작하여 전국의 톱쟁이들과 gmc트럭이 소백산의 골짜기의 산등성이를 끌어내렸고 1975년 화전정리로 양다리, 대궐터, 절골, 원만터, 방통골, 박절터, 샛터의 일개반이 이주 이전 되었으며 옛부터 유겸암선생이 봄철쭉 물들은 선녀탕을 즐겨찾았고 여름폭염 잊으려고 구룡소를 찾고나니 어느새 가을단풍 낙엽 물위에 띄우고 암벽사이 옥류 흘러 바위를 치며 운무가 노송사이를 지나노니 신선이 따로 없다.
김상태 의병장은 남천에서 태어나 이강년 의병장 체포로 잔여의병 700명을 이끌고 소백산에서 항쟁하다 체포되어 대구감옥에서 교수형을 당하시니 이 또한 우리마을의 자랑이 아니던가 맑은 물 맑은 공기 푸른산 꽃덮인 마을 청정지역 전국의 자랑이라 가구마다 큰 뜻모아 마을비를 세우다 1995. . . 단양군 영춘면 남천2리 주민일동
글쓴이의 참고문헌 : 단양군지, 향교지, 온달산성 지표조사보고, 화전정리사, 문화재기, 지명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