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희망이 있는 살기좋은 단양
제목 | 수은정 짓고 영의정 탄핵당한 류성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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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관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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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구곡을 명명한 사람은 조선 영조때 참판을 지낸 경상 오대익이라고 하는 설도 있다. 유서암정(수운정)이 오래되어 교리 오대익이 중창하고 그곳에 살았다 " 라는 기록으로 보아 확실한 것 같기도 하여 교리를 지낸 오대익의 운선구곡가를 소개 한 글은 다음과 같다. 운선동리유선영 : 운선동 계곡엔 신선이 있을것만 같구나 [일곡 대은담] [이곡 황정도] [삼곡 수운정] [사곡 연단굴] [오곡 도광벽] [육곡 사선대] [칠곡 사인암] [팔곡 선화동] [구곡 운선동] 그래서 정감록파들이 단양영춘에 많은 화전을 일구어 먹고살았다는 것이 십승지의 도표에도 나타나지만 쇠말뚝을 많이 박은 것을 보아도 우리지역은 일본사람들이 살기 좋고 인물 많이 나는 길지임이 틀림없다는 것을 증명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채보자주 : 운선구곡은 일면 유곡이라고도하며 운암구곡이라한다. 이곳을 다녀간 명인은 수없이 많다. 고려, 조선을 통하여 문인이나 묵객이나 권력가치고는 지나가지 아니한 사람이 없는 곳이다. 대강면 현 4개리의 땅이 본래 조가네 땅이였다고 한다. 서애 류성룡선생이 선조로부터 하사 받은 호피한장을 팔아서 일대를 매립하고 수운정을 지었고 이곳에 와서 심신을 달래고 정책구상을 했었다. 1591년 우의정으로 있을 때 명나라 토벌을 계획하는 내용의 일본의 국서를 받았을 때 이를 묵인하려는 이산해의 주장을 물리치고 명나라에 알려 의혹을 벗었고 1592년 임진왜란시 도예찰사로 군대를 총괄했고 이순신, 권율을 명장으로 등용시키고 영의정에 올라 왕을 평양으로 모셨고 신집의 탄핵으로 사퇴했다가 평안도 체찰사가 되어 평양의 난을 진압하고 왜군을 파주까지 몰아낸 공로로 다시 영의정에 올라 군사를 총지휘하는 실권자였다. 당시에는 당파싸움으로 일본군 침입의 징조파악을 위해 같던 일본 사신마저도 당리당략에 의하여 진실을 왜곡하던 때이다. 중국의 역사에서도 유명하고 아주 화려한 이름높은 별장임)같은 별장을 지었으며 향락을 즐기고 있으니 전쟁 중에 영의정이란 사람이 이럴 수가 있느냐는 상소로 임진왜란이 끝나기전 사표를 내지 못하고 영의정에서 남인의 우두머리인 서애는 쫓겨나서 고향인 안동으로 낙향한다. 이때 서애는 편지속에서 붉고 푸른 절벽마다 탁핵의 글속에 끌려드는구나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그후 오대익 참판이 수운정을 중건하고 살면서 운선구곡의 글로 남기게 되었다. 운선구곡중 사선대에는 1683년 단양군수로 부임했던 홍만선(1642∼1715)선생은(조선 현종 7년 1666)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조선 숙종 때에는 단양에 제 82대 군수로 부임하고 상주목사 장악원장(현재 국립국악원장)을 역임한다. 홍만선 군수는 10년뒤에 다시 사선대에서 내외종간 형제들이 함께 모여서 시를 짓고 즐겼다고 적었다. 사선대 홍만선, 김성조, 이희조, 이해조등 높은 벼슬한 사람들이 있었음을 볼 때 지금 없어진 사선대 정자 주춧돌과 나무를 바위에 안치고자 팠던 부분의 윤곽이 지금도 확인됐다. 사곡이란 글자는 수해복구로 묻힌 것을 다시 파도록 했다. 완전한 수해복구가 끝나고 사인암지구 택지정리가 완료되면 다시 사선대가 사선정으로 바뀌어 건립될 날이 올 것이다. 여담이지만 선조대왕이 백사 이항복에게 현시대의 청백리는 과연 누구일까 했더니 백사는 1번을 서애를 대었다한다. 단양이 경관으로 인하여 영의정이 탄핵당한 땅을 노산 이은상 선생은 시로서 서애의 누명을 벗겨 주었다. 역사는 물 같이 가는 것, 사람은 구름같이 가는 것, 옳은 인 어디계시고 그이는 누구던고, 수운정 이름 그대로 물과 구름만 남았구나. 어느때 수운정이 퇴락하여 없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수운정 터와 절벽에 남아있는 암각자만이 옛 영화를 알림뿐이다. 암각자는 아래와 같다. 수파심불경 : 물결은 먼저 흐르려 다투지 아니하고 의차의구진 : 구름 또한 유유히 흐르는 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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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07년 12월 26일 18시 59분 29초 |
수정일 | 2010년 8월 4일 15시 4분 13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