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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사슴을 쫓는 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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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신인섭 |
내용 | |
3 만명을 이주시킨 온산병을 아시나여 ! 거기에 어떤 환경피해가 있었는지 정보검색을 해보시고 말씀하세여 ? "사슴을 쫓는 자는 숲을 보지 못한다 " [출처] ㅇㄹ|작성자 시즈쿠
[秘錄환경운동25년]온산병 사태(1) “우리 아아들만은 살리주이소!”
2006 03/21 뉴스메이커 666호
온산공단 인근은 이미 ‘최악의 상황’… "‘한국의 공해지도’(공문연 엮음, 일월서각, 1986년)에 르포 형식으로 생생하게 담겨 있다. 이 무렵 울산공단 주변은 이미 공해가 심각한 지경이었다. 경남 일대에 소문난 울산의 곡창이던 삼산평야는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땅이 돼 있었다. “수확할 게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모내기를 하는 것은 그것마저 하지 않으면 보상금도 받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게 주민들의 얘기였다. 과수·채소농사도 마찬가지였다.
갈치는 처리를 다 못해 거름으로 썼다고 할 정도로 천혜의 어장이던 울산만은 사해로 변한 지 오래였다. 울산만 12개 어장 중 9개 어장이 폐장되고 북쪽 3개 어장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대기오염으로 인한 주민 고통도 심각했다. 남풍이 불면 석유화학 공장에서, 북풍이 불면 알루미늄 공장에서 각기 다른 냄새가 덮치는 식이었다. 날씨에 따라 냄새의 종류와 농도가 달랐다. 그럴 때면 눈이 아프거나 피부병이 생기는가 하면 목에서 피까지 나온다는 게 주민들의 호소였다. “경남 온산공업단지 내 어촌부락 주민 500여 명은 팔·다리와 허리에 심한 통증을 느끼는 이름 모를 괴질에 걸려 고생하고 있었다. 온산공업단지의 폐수가 흐르는 하천과 바다 주변에 사는 이들 어촌주민들 사이에 2~3년 전부터 집단 발병한 이 괴질은 1950년대 일본에서 크게 사회문제가 됐던 중금속 카드뮴 중독에 의한 공해병인 ‘이타이이타이병’의 초기증세와 비슷해 역학조사를 서둘러 대비해야 했다 온산공단이 다른 공단보다 늦게 조성됐는데도 가장 심각한 공해문제를 야기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 군수산업을 겨냥한 비철금속단지로 출발했기때문이며 그때 중금속 오염 우려가 가장 높은 공장들을 주민의 접근을 막아 성역처럼 보호하고 은폐시켰기 때문이다. 온산초등학교에서의 눈물 아이들한테 물었어요. 뼈마디가 아프거나 피부병이 있거나 눈병이 있는 사람 손들라고 하자 52명 중 26명이 손을 들더라고요. 그 자리에서 많이 울었어요. 이후 제가 온산 병을 주제로 곳곳에서 강연을 했는데, 그때마다 경찰이 연금을 시키더라고요. 당시 신문에도 제가 연금된 사건이 보도됐어요.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건 현장입니다. “제가 1980년대 운동을 시작할 때만 해도 기업은 환경문제에 진짜 관심이 없었어요. 울산의 온산에서 오염물질이 나와 그 지역 농작물이 다 죽고 주민들이 병에 걸려 있는데도, 공해를 유발한 기업들은 자기네 공장 앞에 빨간 글씨의 ‘접근금지’팻말을 세워놓고 우리를 막았어요. .... 생략... 님보세여 ! 왜 장암리에 다녀오신것은 구체적 말씀이 없나여 !! 국가가 운영할 때 전부 공해를 다 배출했다고요 그러나 천만의 말씀입니다 지금 니꼬 기업이 국가에 덤태기를 씌우고 있습니다. 그때 사실은 민영화 되었을 때 (1976년) 공해를 더 많이 배출하였습니다. 제련비 아끼려고 청산가리 갔다가 물퍼쓰듯 하고 아예 황산공장도 만들었고 당시 생산시설도 연간 1500톤 생산에서 연간 5만톤으로 생산시설을 30배 더늘리고 하여 공해피해가 당시 너무나 커서 국가가 탈황시설을 갖추도록 행정명령하게 됩니다. 그때 기업은 탈황시설의 투자를 수익성이 없다고 외면한 채 온산공장으로 떠납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국가가 다 오염시켰다고 덤태기를 씌움니다. 당시 이들 기업에 의하여 산업폐기물을 수만톤을 인근 연안공유수면에 불법으로 매립하였습니다 ! 만일 이러한 사실을 부인하고 계속 거짓말을 하면 검찰에 고발조치를 검토 하겠습니다 그리고 엘에스 니꼬를 따라간 단양군민의 장암리 방문단은 ! 피해 주민 접촉이 일체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니꼬 공장내부와 주최측에서 불러온 사람 그외 여타 주민을 만나는 것은 철저히 통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님들로 부터 환심을 사기위해 회집에서 가서 활어회 접대를 하였습니다. 그때 일부의 사람은 "회" 얻어 먹으러 여기까지 온 것이냐 견학은 피해 주민도 만나보고 돌아보기도 하고 하려고 여기 온것이 아니냐고 강력히 항의 하신분도 계시었습니다.....그러나 찻잔속의 회오리로 끝났지요 받아줄리가 없는 그들이었지요 그래서 회 거저 먹은 것 아닙니다 지금 회갑 치루고 있는 것입니다 , 그러니 회먹은 자들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있나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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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09년 9월 29일 9시 45분 27초 |
수정일 | 2009년 9월 30일 9시 24분 24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