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천년의 사랑이 묻어나는 온달관광지 -
휴가철을 맞아 자녀들과 함께 문화와 역사를 체험하는 테마여행을 계획했다면 고구려의 숨결이 깃든
온달관광지를 방문하는 것도 의미 있는 여행이 될 듯싶다.
단양에서 영월 방면 59번 국도를 이용해 군간교에서 우회전하면 595번 지방도로와 만나게 되는데
영춘교에서 우회전하여 남천교를 지나면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천년사랑이 묻어나는 온달산성과
4억 5천만년의 신비를 간직해온 온달동굴과 만난다.
사적 제264호인 온달산성은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 온달이 신라군의 침입 때 이 성을 쌓고 싸우다가
전사하였다는 전설이 있는 옛 석성(石城)이다. 성의 둘레 683m, 동쪽 높이 6m, 남북쪽의 높이 7∼8m,
서쪽의 높이 10m, 성의 두께 3∼4m로 영춘을 돌아 흐르는 남한강 남안의 산에 길이 70cm, 너비 40cm,
두께 5cm 크기의 얄팍한 돌로 축성한 성으로 아직까지 현존하고 있다.
이와 함께 온달산성 바로 아래에는 온달동굴이 위치하고 있는데, 온달장군이 전쟁도중 쉬던 곳이라
전하며, 천연기념물 제261호로 지정돼 있다. 이 동굴은 조선시대 문헌 ‘동국여지승람’에 남굴이라 기록
되어 있으며, 성산 아래에 있어 일명 성산굴이라고도 불렸다.
온달동굴은 석회암 지대에 형성된 천연동굴로 생성 시기는 최장 4억 5천년 전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총 길이는 760m로써 입구에서 동쪽으로 길게나 있는 주굴과 이곳에서 갈라져 나간 다섯 갈래의 굴로
이루어져 있다.
동굴 내부에는 여섯 곳의 광장이 있고 군데군데 신비로운 석순과 종류석이 발달해 있다.
동굴내부에는 수심 80cm~1m 정도의 물이 흐르고 물고기가 서식하고 있으며, 동굴 내 기온은 대체로
16℃내외이고 겨울은 14℃내외이다. 이처럼 온달산성과 온달동굴을 중심으로 한 영춘면 일대에는
온달의 발자취가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다.
고구려 영양왕 1년(서기 590년) 치열한 삼국의 영토분쟁 속에서 신라에게 빼앗긴 죽령일대의 옛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영춘면 지역에서 신라군과 전쟁을 치루던 온달장군이 앉아서 쉬었다는 바위가 있던
마을은 지금도 그 이름이 ‘휴석동(休石洞)’이다.
또한 영춘면 장발리 '선돌'에는 온달장군의 누이동생이 온달을 돕기 위해 온달산성으로 달려오다,
성에 못 미친 장발리에서 온달의 전사 소식을 듣고 대경실색해 제자리에 선 채 숨이 막혀 죽었고 한에
사무친 시신이 돌로 변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단양군의 캐릭터이기도 한 온달장군과 평강공주는 고구려 평원왕(평강왕) 때(559~590)의 사람이다.
평강공주는 16세에 사대부와 혼인하라는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온달과 부부의 연을 맺었고,
바보 온달을 고구려의 무사로 키워냈다. 온달은 영양왕이 즉위한 590년, 신라에게 빼앗긴 한강유역의
탈환을 위해 출정할 것을 왕에게 아뢰고, '계립현과 죽령 서쪽의 땅을 우리에게 돌리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말을 남기고 출정해 신라군과 더불어 아단성(온달성) 아래에서 싸우다 화살에 맞아 죽는다.
장사를 지내려하였으나, 관이 움직이지 않아 평강공주가 달려와 관을 어루만지며, '죽고 사는 것은 이미
결판이 났으니 돌아 가시오'라고 하니, 관이 움직여 장사를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전한다.
단양군에서는 온달과 평강공주에 얽힌 이야기를 테마로 온달동굴과 온달산성을 하나로 묶어
온달관광지로 조성하고 있으며, 매년 가을 ‘온달문화축제’를 열어 이들의 혼을 달래 오고 있다.
이외도 온달관광지에는 1만3천㎡의 부지에 당나라 황궁과 저택, 저자거리 등 중국양식 건물 47여동이
역사적 고증을 거쳐 재현돼 있다.
한편, 온달관광지 주변에는 단양 제2팔경 가운데 하나인 북벽과 영춘면 남천리에 위치한 남천계곡과도
만나게 되며 인근에는 소백산 구봉팔문과 함께 조화를 이루고 있는 천태종 총본산 구인사도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다. |